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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킹제이는 원작의 주인공인 캣니스뿐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영중이와 준수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겨낼 것입니다.

 

 

 수많은 관중과 눈부신 조명, 사람을 낱낱이 훑어내는 카메라까지. 준수가 헝거게임에 자원하면서 각오했던 지옥은 이런 게 아니었다.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쓴 MC가 준수의 코앞까지 다가와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실실거렸다.

“고향에 두고 온 연인은 있습니까?”

“아니요.”

“에이, 이렇게 잘생겼는데요. 거짓말할 필요 없어요. 우리 관객분들이 다 비밀로 해주실 겁니다.”

 와하하. 객석에서부터 기만적인 웃음이 퍼져나갔다. 이 토크쇼가 전국에 생방송 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준수는 온몸이 굳은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차라리 당장 이 자리에서 일대일 결투를 하라고 하면 했지, 이딴 식의 토크쇼는 체질에 맞질 않았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대답은 좀처럼 길게 나오질 않았다.

“자원을 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이유죠?”

 죽더라도 캐피톨에 와보고 싶었다.

 그게 준수가 연습한 대답이었다. 캐피톨 인간들은 준수처럼 가난한 구역 태생은 캐피톨을 선망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소년이 곧 비눗방울처럼 사라질 꿈과 희망을 품고 있다는 건, 또 그걸 이루기 위해 악착같이 절벽을 오른다는 건, 캐피톨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러나 준수는 도무지 그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눈알로 파고드는 조명이 너무 눈부셨고, 사람들의 시선에 현기증이 났다. 입안의 혀는 제 것 같지 않게 딱딱해서 꾸며낸 말을 내뱉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묵을 길게 유지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곧 벌어질 살육게임은 단순히 힘이 세다고 이기는 정정당당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이건 거대한 쇼다. 12개의 구역에서 남녀 한 쌍을 뽑아 거대한 우리에 가둬놓고 한 사람만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과정은 수천 대의 카메라를 통해 캐피톨의 사람들에게 낱낱이 공개된다. 캐피톨의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자금을 대고, 그 자금은 선수가 먹고, 마시고, 공격하고, 숨는 모든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한마디로 스폰서가 되어주는 것이다.

 준수는 이 살육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폰서를 모아야 했고, 이 토크쇼는 그 기회였다.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질려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준수는,

“……동생 약값 준대서 손 들었습니다.”

 솔직하게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객석이 술렁거렸다. MC도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와 다른 말이 나오자 살짝 당황한 눈치였으나 능숙하게 토크쇼를 이끌어나갔다. 그는 과장된 표정으로 깜짝 놀라는 연기를 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손을 들어요? 그게 무슨 의미죠?”

“원래 걸렸던 놈의 부모가 자원하는 사람에게 돈을 존나게 많이 준다고……. 그, 12구역에 걔만큼 멀쩡하게 사는 사람은 드물어서요.”

“세상에. 맙소사. 이렇게 눈물 나는 가족애가 있다니!”

 MC는 가슴에 손을 얹더니 하늘을 바라보며 우는 시늉을 했다. 준수는 시선을 슬쩍 돌려 멘토인 현성을 확인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긴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에는 뭐라고 답했는지 모르겠다. MC가 이만 내려가도 좋다고 신호를 줬을 때, 준수는 솔직하게 고마운 감정마저 느꼈다. 물론 한 걸음도 떼기 전에 뒤로 돌아 면상에 침을 뱉고 싶어졌지만 말이다.

 준수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서 현성과 마주치자마자 욕을 내뱉었다.

“씨발, 이딴 좆 같은 건 왜 해야 해요?”

“조용히 해라. 관계자들 많다. 니는 연습대로 하지도 않아놓고 뭐가 그리 불만인데?”

 현성은 혀를 끌끌 찼다.

“가족애 이딴 거 작년에 누가 제대로 써먹어서 한물갔다고 내가 몇 번 말했냐? 내 말 안 들을 거면 나 여기 왜 있어? 나 집에 갈까?”

“하…… 죄송합니다.”

 준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사과는 똑바로 했다. 현성은 준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툭툭 쳤다. 워낙 솔직한 녀석이라 이런 식으로 꾸며낸 자리가 편안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녀석치고는 잘한 셈이다. 처음에 연습할 때 ‘그러니까, 그, 저기, 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렇다. 현성은 준수를 조금이라도 북돋아 주려고 씩 웃으며 준수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도 너는 이 얼굴이 잘생겨서 괜찮을 거다. 캐피톨 녀석들 얼굴 얼마나 보는데.”

 누군가 그 대화에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그러네요.”

 현성은 물론이고 준수까지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가만 보니 준수보다도 키가 큰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남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영중. 그는 올해 헝거게임 조공인 중에 가장 유명한 녀석이었다. 올해 우승자를 점치는 내기는 저 녀석 때문에 다 망했다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미친놈이 정성 들여 키운 사냥개였으니까.

 현성이 영중을 보며 ‘햐, 새끼 잘 싸우게 생겼네.’라며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영중은 사람 좋은 얼굴로 싱긋 미소 지었다.

“잘생기면 좋지. 앞으로 잘 부탁해.”

“서로 죽일 놈인데 잘 부탁하긴, 무슨.”

 준수는 남자를 노려보며 답했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올해 인터뷰 순서는 제비뽑기로 진행이 되었고, 이번에는 남자의 이름이 뽑혔다. 그는 지시에 따라 무대 위로 올라갔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자 남자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박수와 휘파람 소리가 더욱 거세지며 MC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남자와 MC는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휘청거리며 합을 맞추다가 박수 소리가 멎자 마주 보며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이토록 큰 환영이라니! 캐피톨 전원이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아시겠습니까?”

 MC가 꺼내는 멘트부터 준수 때와는 달랐다. 게다가 말은 또 어찌나 청산유수인지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객석에서는 엄청난 호응을 보였다. 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던 현성이 혀를 끌끌 찼다.

“치사한 놈이네. 얼굴도 저래 생겨먹고 덩치도 크고, 말은 또 왜 저리 잘하는데? 쟤가 전영중인가 걔잖아. 2구역에서 유명한 놈.”

“제가 어떻게 알아요.”

“어른이 말하는 데 와 이리 틱틱 대는데? 아니지, 니 저놈한테 불만 있나?”

“…….”

 준수는 말하는 대신 무대 위에 서 있는 영중을 노려보았다. 그는 무대가 체질인지 조명을 받자 얼굴이 더욱 반질반질해져서 사람이 참 좋아 보였다. 게다가 캐피톨에 대한 충성심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원래는 12구역에 살았다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2구역으로 가게 되었습니까?”

“모든 게 캐피톨의 은혜 덕분입니다. 제 양아버지에 대해서는 다들 아실 겁니다. 제50회 헝거게임에서 영광의 주인공이 되셨지요. 아버지께서는 캐피톨을 빛낼 인재를 발굴하고자 하셨고, 감사하게도 제 재능을 높이 사주셨어요. 그리고 그 소년이 자라나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네요. 드디어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감격이 멈추질 않습니다. 아…….”

 영중은 마치 눈물이라도 나올 것처럼 고개를 숙였고 객석에서는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MC가 영중에게 손수건을 건네자 영중은 고개를 가리며 “울지 않아요! 울지 않습니다!”하고 손사래까지 쳤다. 그 모습이 웃기고 또 귀엽게 비쳤는지 객석에서 안타까움이 섞인 환호성이 터졌다.

MC가 또다시 과장된 제스처로 영중을 달래고, 영중이 달큼한 웃음을 터트리며 이 사태가 진정되었다.

“씨발, 별짓을 다 하네.”

“재능이다. 재능. 저건 부러워해야지.”

“부럽긴요. 역겨운 새끼…….”

“마! 남들 다 하는데 왜 쟤한테만 그리 짠데? 너…….”

 현성이 말을 하려다 말고 뭔가 깨달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헛기침만 뱉었다. 준수 또한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무대를 노려볼 뿐이었다.

 단란한 분위기의 무대에서는 MC가 영중에게 하나라도 더 캐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에게는 좋은 아이템이 있었다.

“12구역에서 왔다면 올해 아름다운 가족애를 보여준 소년을 만난 적이 있겠지요?”

“씨발…….”

 준수는 욕을 읊조리며 무대에서 등을 돌렸다. 영중이 그 화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영중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준비해두었는지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준수 말이죠?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해요.”

“오오, 답이 기대되는데요?”

 영중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 뒤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준수와는 섹스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객석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객석뿐만이랴, 이 무대를 주도한 MC는 행복해서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고, 무대 뒤편에서 준비 중이던 그 모든 사람도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리고 그 모두의 시선은 오롯하게 준수를 향했다. 준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어금니를 아득바득 물었다.

“저 새끼가…….”

 

* * *

 

 영중은 훈련을 마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목에 두른 수건으로 뺨을 닦아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도 오늘은 원하는 만큼 훈련할 수 있었다. 토크쇼가 끝나고 모든 조공인이 기진맥진했는지 훈련장에 나오지 않은 까닭이었다.

‘내가 활을 쏠 수 있는 건 마지막까지 숨기는 게 좋겠지. 스폰을 받기 위한 재료는 이미 충분하니까. 숨길 건 숨기고, 드러낼 것은 드러내서…….’

 영중은 양아버지가 세뇌하다시피 반복했던 말을 되새기며 자신의 숙소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 등 뒤에서 그를 덮치며 바닥으로 자빠트렸다. 영중은 잽싸게 몸을 돌려 상대의 두 팔을 강하게 비틀었다. 손에 들고 있을 무기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무슨.”

 영중은 당황했다. 첫째로는 상대가 생각보다 강해서 생각만큼 팔이 비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상대의 손에 무기가 들려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상대의 얼굴이 낯이 익어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뭘 놀라 씨발 새끼야.”

“…….”

“왜? 아직도 내가 기억이 안 나냐? 아깐 잘도 나불거리더니 이제는 왜 한마디도 안 하는데? 그 빌어먹을 쇼에서 그랬잖아. 나랑 뭐? 섹스도 할 수 있다고 그랬던가? 이 씨발놈이…….”

 준수는 영중의 복부가 의자라도 되는 양 편하게 앉아 떠들어댔다. 영중은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지만, 준수는 떨어져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지. 영중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준수를 올려다보았다.

“……준수야, 너 그거 때문에 고맙다고 찾아온 거면 날 이렇게 대하면 안 되지.”

 그 순간 영중의 턱이 홱 돌아갔다. 봐줄 생각이 없다는 건 주먹 한 방으로 충분히 알겠다. 머리가 얼얼했고, 입안에 피가 고였다. 영중은 입안에서 혀를 굴리더니 피를 퉤 뱉어냈다. 준수는 그 꼴을 바라보며 여전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어디까지 개소리를 할 수 있나 두고 보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영중은 준수의 그 어떤 행동에도 개의치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준수를 올려다보며 차분하게 답했다.

“네 그 멍청한 말솜씨 때문에 스폰 죄다 날아갈 뻔한 거 내가 도와줬잖아. 그래서 고맙다고 찾아온 거 아니야?”

 준수는 영중의 턱에 주먹을 한 번 더 꽂으려다가 신의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여기서 작살을 내놓으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이 모든 의문은 풀리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헝거게임 이전에 조공인끼리 다툰 게 들통나서 좋을 것 없었다.

“그게 어떻게 도와준 게 돼, 씨발. 내 기분만 잡치지.”

“준수야, 나랑 그렇게 엮여서 불쾌한 마음은 알겠는데 생각이라는 걸 좀 하지 그래? 헝거게임에 로맨스는 몇 번 나왔지만 게이 커플은 한 번도 나온 적 없어. 캐피톨은 늘 새로운 걸 좋아하지.”

“네 좆 같은 머리에서 나올 법한 생각이네.”

“난 살아남을 방법을 마련한 것뿐이야.”

“그래서. 너랑 내가 이 미친 게임에서 서로 좋아죽는 척하면 된다는 거냐?”

“응. 준수도 그렇게 해주면 좋긴 한데, 일단은 내가 할게. 넌 연기 같은 거 소질 없잖아.”

 당연하다는 듯 꺼내는 말이 준수의 심기를 거슬렀다. 준수는 영중의 귀 바로 옆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근데 시발 왜 날 골라. 나 말고 사내새끼가 열 명은 더 있는데!”

 영중은 당연하다는 듯이 눈을 시퍼렇게 떴다.

“네가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되니까. 안 그래? 이딴 작전도 전부 얼굴로 하는 거지. 못생긴 놈이랑 붙어먹는다고 누가 좋아하겠어?”

 준수는 기가 차서 허공이 쨍하니 울리도록 하! 하고 숨을 뱉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준수는 사납게 중얼거리더니 영중의 멱살을 냅다 휘어잡았다. 영중은 다시 한번 주먹이 날아올 것을 각오하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러나 다가온 것은 주먹이 아니라 말캉한 입술이었다. 따뜻한 혀가 아랫입술을 훑고 지나갈 때, 영중은 눈을 크게 뜨며 준수의 어깨를 밀쳐냈다.

“너 미쳤어?”

 영중은 내동댕이쳐진 준수를 바라보며 새된 소리로 물었다. 영중의 얼굴은 삽시간에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무대 위에서 태연하게 섹스 운운하던 녀석의 얼굴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하하……. 이거 웃긴 새끼 아냐?”

 준수는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면서도 영중을 바라보는 표정에는 승리감이 엿보였다.

“섹스도 할 수 있다더니 고작 입술 좀 부빈 걸로 이 지랄이냐?”

“너, 너……!”

“연기는 누가 못할지 두고 보자. 내가 보기엔 네가 나한테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영중의 숙소에서 빠져나갔다. 긴 복도를 걸으며 소매로 입술을 닦는 태도에는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귓바퀴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네가 그럼 그렇지. 등신…….”

 

* * *

 

 열두 개의 구역 중에서 12구역은 가장 가난했다. 다 무너져가는 빵집이라도 하나 갖고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마저도 없으면 남의 집에서 일을 해줘야 했는데, 남의 집 사정도 뻔하다 보니 콩고물 떨어지는 것이 무척 적었다. 그러다 보니 두 소년은 하루에 한 끼를 먹는 일도 버거웠다. 먹는 것도 없는데 자꾸 자라기만 하는 몸은 허기를 더 빨리 느꼈고, 소년들은 매일 배를 굶주리며 숲에서 다람쥐를 잡으러 다녀야 했다. 그것도 나라에서 금지한 일이라 한계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중, 5월생이던 영중이 먼저 열두 살이 되었다. 열두 살이 되자마자 영중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헝거게임 뽑기 상자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추가로 집어넣은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정부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으니까.

 준수는 그런 영중을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도 열두 살이 되면 이름을 넣을 거야. 당장 굶어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나으니까.”

“운 좋으면 안 뽑힐 수도 있지.”

 영중이 낙천적으로 말하자 준수는 코웃음을 쳤다.

“확률의 신이 언제나 당신의 편이기를.”

 캐피톨에서 언제나 하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두 사람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영중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확률의 신은 우릴 저버릴 거야. 우린 앞으로도 이름을 많이 넣게 될 테니까.”

“까짓거 나가서 이기면 그만이야.”

 준수의 호기로운 말에 영중은 웃음을 되찾았다. 그의 겁 없는 말이 용기를 준 것 같았다.

“그건 맞아. 그래도 우린 둘 다 남자니까 같은 경기에 나갈 일은 없겠다. 그럼 둘 다 우승해서 살아 돌아오면 돼. 그렇지?”

“당연하지.”

 준수는 아직 작은, 그러나 또래보다는 큰 손을 바짝 움켜쥐었다. 험하게 자란 탓에 제법 매서운 주먹이었다. 영중은 결의에 가득 찬 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맞아. 나 오늘 받은 음식 중에 이런 게 있었어.”

 영중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진한 갈색빛을 띠고 있는 초콜릿이었다. 캐피톨에서는 아무도 먹지 않는 싸구려 음식이었지만 두 소년에게는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진귀한 보물이었다.

“야, 이걸 왜 가져 와.”

“준수랑 나눠 먹으려고. 너 단 거 좋아하잖아.”

 준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초콜릿에서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강렬한 단내가 풍겼다. 하지만 이건 영중의 목숨값이었다. 준수가 고민하자 영중은 납작한 바 형태의 초콜릿을 살짝 뜯어서 준수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끙…….”

“한 입만 먹어봐. 진짜 맛있대.”

“으음…….”

“아, 진짜. 준수 너도 이름 넣는다며. 너도 나중에 나 하나 나눠주면 되잖아.”

 영중은 준수의 입술 사이로 초콜릿을 밀어 넣었다. 결국 준수는 입술을 조금 벌려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그러자 혀끝부터 부드러운 단맛이 퍼지더니 이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혀를 조금 움직여 단맛을 쫓아다니자 금방 형체를 잃고 입안에서 몽땅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치 짧은 꿈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맛있어?”

“존나 맛있어.”

“욕 쓰지 말라니까!”

“존나 맛있는데 어쩌라고! 빨리 너도 먹어봐.”

 영중은 준수의 성화에 못 이겨 초콜릿을 한 입 먹었다. 단맛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토록 강렬한 맛은 처음이었다. 영중은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킥킥 웃었다.

“우리 이거 숨겨놓고, 조금씩 떼어먹자.”

 둘은 군인들이 두고 간 비닐봉지를 훔쳐다가 초콜릿을 둘둘 말았다. 열두 살 소년들은 이 초콜릿을 완벽하게 숨길 장소를 알았다. 오래전에 새가 떼죽음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남아있는 둥지에는 그 어떤 새도 접근하지 않았다. 준수는 나무를 순식간에 기어올라 둥지에 초콜릿을 숨기고 낙엽으로 여러 번 덮었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숨겨놓은 하잘것없는 보물이 이것저것 숨겨져 있었는데, 그중에서 초콜릿은 으뜸가는 것이 되었다.

 그 초콜릿을 다 먹어갈 즘, 준수도 열두 살이 되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받아온 물자에는 새 초콜릿이 있었고, 준수는 당연한 것처럼 그것을 둥지에 숨겨놓고 영중과 나누어 먹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미덥지 않은 약속을 할 때면 버릇처럼 이렇게 물었다.

“너 그거 거짓말이면 둥지에 숨겨둔 거 내가 먹는다.”

 정말로 초콜릿을 혼자 독차지하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 줄 알면서도 두 사람은 둥지 이야기가 나오면 하는 수 없다는 듯 진실을 고하고는 했다. 그건 두 사람 사이의 깰 수 없는 약속이었다. 군인들 몰래 숲을 넘나드는 소년들에게는 목숨을 건 맹약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이름을 넣은 해, 확률의 신은 소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두 소년 대신 이름이 불린 남자는 헝거게임에 끌려갔고,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죽었다. 살려달라고 울며 비는 남자를 보는 순간 두 소년은 헝거게임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전에도 보았던 것인데 그 자리에 자신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모든 것을 다르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소년은 또다시 뽑기 상자에 이름을 넣었다. 확실한 죽음과 불확실한 죽음 중에 무엇을 골라야 할지는 명확했으므로.

 그래도 준수는 뽑기 상자에 이름을 넣는 것으로만 생계를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꾸준히 숲으로 향했다. 보통은 영중과 함께였지만, 식량이 급하면 혼자서 빠르게 다녀올 때도 있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운이 좋아서 다람쥐를 몇 마리나 잡았다. 활 솜씨가 오락가락하더니 요즘은 내내 잘 쏘는 기분이었다.

“한 마리는 전영중 줄까…….”

 준수는 씩 웃으며 철창을 넘어 12구역으로 돌아갔다. 곧장 영중의 집으로 향하던 소년은 거리에 흐르는 공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뭐라고 쑥덕거리기도 했다. 준수는 미간에 힘을 빡 주면서도 걸음을 세우지 않았다. 영중은 이것저것 잘 주워듣는 녀석이었으니 설명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준수가 목도한 현실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빠!”

 무릎에 멍이 든 지수가 엉엉 울며 준수에게 안겨들었다. 그러고는 끔찍한 말을 뱉었다.

“이상한 아저씨가 영중 오빠 데려갔어! 헝거게임에 내보내겠대!”

 무거운 것에 머리를 후려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준수는 품에 달라붙는 지수를 간신히 떼어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헝거게임은 얼마 전에 끝났잖아!”

“몰라……. 자기가 우승하는 법을 알려준다면서, 그러면서…….”

 지수는 아직 9살이었다. 자기가 겪은 충격적인 일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결국 준수는 지수를 집에 데려다 놓고 곧장 역으로 달려갔다. 대충 영중이 2구역으로 간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은 까닭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준수는 역 안으로 발도 디디지 못했다. 군인은 자꾸만 달려드는 준수를 발로 차내며 혀를 쯧쯧 찼다. 그는 마지막 동정심이라도 베풀 듯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네 친구 호강하러 가는 거야. 이번 헝거게임 우승자가 후계자를 키워보고 싶다나, 이상한 변덕을 부린 덕분에 신분 상승하는 거라고. 가서 귀한 대접 받으면서 클 테니까 발목 잡지 말고 꺼져라.”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헝거게임에 참가해야 하는데!”

“쯧……. 그거야 저 녀석 선택이지. 헝거게임에서 우승하면 부귀영화가 기다린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 불확실한 죽음에 미래를 걸었던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이 기차를 타고 가면 그는 무조건 헝거게임에 참가해야 했다. 영중이 그걸 택할 리 없었다. 그딴 개 같은 선택을 할 리가……. 멍청한 새끼이긴 했지만, 허영에 가득 차 있는 놈은 아니었다. 헝거게임에 우승해도 23명을 죽인 살인자가 되는 건데 행복할 리가 있겠냐며 감성적인 소리를 하던 녀석인데…….

 준수는 군인을 피해 역사 벽면을 따라 무한히 걸었다. 그리고 결국 역사 창문에 턱을 괴고 있는 영중을 발견해내고야 말았다.

“전영중!”

 준수는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영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영중은 깜짝 놀란 듯 상체를 바짝 세웠다. 준수를 더 자세히 보려는 것 같았다.

“야! 창문 열어. 열어봐! 얘기 좀 해!”

 준수는 큰소리를 치며 창문을 열어젖히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영중은 무언가 눈치를 보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준수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번개처럼 빠르게 창문에 달라붙었다.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진짜 네가 가겠다고 한 거야? 아니지?”

 영중은 자신을 몰아붙이는 물음에 정신 없어 하다가 이내 바보처럼 씩 웃었다.

“나한테 재능이 있대.”

“……뭐?”

“자기 말 잘 들으면 무조건 우승할 거래. 우승하고 나면 내가 너랑 지수도 캐피톨에 데리고 갈게.”

“뭔, 뭔, 개소리야. 헝거게임 그거 싸움만 잘한다고 이기는 거 아닌 거 알잖아. 나랑 다 했던 얘기잖아!”

“그 아저씨도 그 얘기했어.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다 훈련 시켜주겠다고 했어. 내가 말하는 거, 생각하는 거, 움직이는 거, 다 가르쳐준다고.”

“야, 그건…….”

 네가 네가 아니게 되는 거잖아. 넌 그게 진짜 좋다는 거야?

 준수는 그렇게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영중은 준수의 어깨를 툭 밀치며 자신에게서 멀리 떼어놓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오늘 받은 물품에 진통제가 좀 들어있었어. 그걸로 지수가 낫진 않겠지만 그래도 꼭 먹여. 지수가 몰래 팔지 않게 감시 잘하고……. 그리고 둥지 안에 있는 건 네가 다 먹어. 나 돌아오려면 오래 걸리니까.”

“개새끼야, 그걸 내가 왜 혼자 먹어!”

“아하하.”

 영중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손을 뻗어 준수의 뺨을 한 번 어루만졌다. 까칠한 손이었지만 적어도 그 손길만큼은 낯이 뜨거워질 만큼 부드러웠다.

“안녕.”

 영중은 준수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창문을 닫았다. 준수는 곧장 창문을 열려고 했지만, 밖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열리지 않았다. 준수는 창문에 대고 고함을 쳤다.

“이 씨발놈아! 내가 캐피톨에 따라갈 줄 알아? 네 목숨값 안 받아, 씹새끼야! 역겨워서 못 받는다고! 너 이대로 가면 나 다시는 너 안 봐! 알겠냐고!”

 영중은 욕을 한 바가지를 들어놓고 뭐가 좋은지 씨익 웃었다. 준수는 복장이 터질 지경에 되어서 더욱 길길이 날뛰었고, 결국 군인이 와서 그를 잡아가야 했다. 이제 겨우 열두 살을 넘긴 소년은 성인 남성 여럿에게 무력하게 끌려갔다. 흙바닥 위로 내동댕이쳐진 준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영중이 떠나서는 아니었다. 영중이 떠나는 걸 막을 수가 없어서, 그 빌어먹을 개새끼가 지가 좋아서 떠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커서 그랬다. 그래도 결국 준수는 울지 않았다. 소년은 어금니를 세게 깨물고 숲으로 갔다. 그리고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 * *

 

 헝거게임이 시작되기까지 단 10초. 준수가 갇혀있는 거대한 유리관 안에서 초시계가 울렸다. 10, 9, 8……. 준수는 생각했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 놓일 줄 알았으면 뽑기 상자에 이름을 한 움큼 넣었을 거라고. 7, 6, 5. 현성이 그랬지. 위기에 처하면 영중을 찾아가서 로맨스를 찍으라고. 그건 정말 하고 싶지가 않다……. 4, 3, 2. 근데 영중이 그 새끼는 원래 18살에 헝거게임에 참가할 예정이 아니었나? 1, 0. 그딴 거 알 게 뭐야.

 유리관이 열리자, 준수는 목숨을 태울 기세로 커다란 가방을 향해 뛰었다. 머릿속에서 현성의 조언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 물자를 향해 달려가면 반 이상이 죽는다. 하지만 난 네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네가 선택해. 시작하자마자 죽을지, 남들보다 많은 걸 가지고 시작할지.’

 준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가능성 있다면서요. 그럼 전 해요.’

 준수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단검을 피하고 곧장 활을 쐈다. 화살은 정확하게 상대의 이마 정중앙을 꿰뚫었고, 준수는 곧장 자세를 바꿔 자리를 이탈하려고 했다. 현성이 조언했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고 확신한 순간에도 이 자리에 남아있지 말라고. 그러나 누군가 준수의 발목을 강하게 움켜쥐며 그는 바닥으로 자빠졌다. 물론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곧장 주변을 더듬어 돌을 찾아내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를 내리찍었다. 상대도 악착같이 준수의 몸 위로 올라타 목을 졸랐다. 머리에 피가 몰리는 상황에서도 준수는 무릎으로 상대를 걷어차고, 돌을 내리찍었다. 서서히 숨이 차오르며 몸에 힘이 빠지던 중, 준수를 덮친 상대가 왈칵 피를 쏟아내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준수는 피를 뒤집어쓴 채 곧장 방어 자세를 취했다.

 준수와 눈이 마주친 것은 영중이었다. 그는 자기 턱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더니 준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우리밖에 안 남았어. 다 도망가서.”

 그렇게 말하는 영중의 등 뒤로 대포 소리가 퍼져나갔다. 준수는 허공을 응시한 채 그 소리를 셌다.

 하나, 둘……. 대포는 무려 11번이나 울렸다. 24명 중에 벌써 11명이 죽었다는 뜻이었다. 헝거게임이 시작된 지는 이제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준수는 피가 축축한 손을 쳐내며 스스로 일어났다. 영중이 몇 명이나 죽였을지, 또 그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말하는 법, 생각하는 법,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지금의 영중은 열두 살의 영중과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죄책감을 묻는 건 어리석은 일 같았다.

‘23명을 죽인 살인자가 되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는 이제 안 하겠지.’

 준수는 한참을 졸린 목을 가다듬으며 인상을 썼다.

 실제로 영중은 준수의 상처에 신경을 쓰는 대신 남아있는 물자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안에서 몇 가지 물건을 챙기더니 남은 물자에 기름을 쏟았다.

“야, 야, 뭐 하는 거야.”

“태울 거야. 내가 필요한 만큼은 챙겼으니까.”

“더 필요한 게 생기면 어쩔 건데?”

“그럴 일 없게 할 거야. 무엇보다…… 지킬 게 남아있으면 안 돼.”

 영중은 공허한 시선으로 중얼거리며 물자에 불을 붙였다. 삽시간에 거대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준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기둥에서 멀어졌다. 이왕이면 물건 몇 개를 더 살피려던 것이 수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작은 주머니가 얼굴로 날아왔다. 준수는 반사적으로 낚아채며 욕을 읊조렸다.

“뭐 하는 거야, 새끼야.”

“음식이야. 네가 챙긴 가방에는 무기밖에 없을 거야. 네가 벌써 죽으면 내가 곤란해서……. 무슨 말인지 알지?”

 영중은 여전히 그놈의 ‘자극적인 TV쇼’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중에 저 새끼가 카메라 앞에서 뭔 짓을 하자고 할지 벌써 소름이 끼쳤다. 준수는 곧장 뒷걸음질을 쳤다. 더 이상 이 녀석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영중은 그 모습을 보며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나도 따로 갈 거야. 준수한테 목 따이긴 싫어.”

“나중에 따려고 아껴두는 거야, 개새끼야.”

“날 아낀다고? 그거 감동이네.”

 준수는 영중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쫙 펼쳤다. 영중은 큭큭 웃으며 뒤돌아서 숲을 향해 걸어갔다. 준수가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지, 공격해도 막을 자신이 있다는 건지. 어느 쪽이든 속이 뒤집히긴 매한가지였다.

 어쨌든 준수도 불타버린 물자 옆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영중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숲으로 숨어들었다.

숲은 준수에게 익숙한 공간이었다. 이곳이 캐피톨의 개자식들이 만든 아레나라는 걸 알면서도 발아래 느껴지는 축축한 흙의 감촉이 그의 마음을 조금 안심시켜주었다. 준수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하려면 안전한 장소를 골라야 했으니까.

 마침 나무 위에는 새가 떠나간 둥지 하나가 보였다. 준수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너무 무겁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빼서 둥지에 숨겨두었다. 가방 안에는 영중이 말한 대로 무기가 가득했다. 준수로서는 어떻게 쓰는지 짐작도 안 가는 물건 투성이었지만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가는 위협이 될 테니 아무렇게나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둥지 한가득 물건을 밀어 넣고 나니 픽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 전영중이랑 만들어둔 거랑 비슷하게 생겼네.’

 준수는 제 생각에 놀라 얼굴을 굳혔다.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그때 둥지에는 배지 장식이나 초콜릿처럼 소중한 것들이 들어있었으니까. 준수는 아까보다 서늘해진 얼굴로 둥지 위에 낙엽을 뿌렸다.

 남긴 물건은 활과 화살, 그리고 단검과 밧줄 정도였다. 화살은 헝거게임 직전 훈련을 받으면서 몇 번 본 물건이었는데 나무로 만든 것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났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해서 절대 부러지지 않았고, 바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화살은 열 개 정도였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사냥할 때는 나무 화살을 만들어 써도 충분할 터였다.

 그러는 사이에 또다시 대포 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확하게 절반이 남았다. 준수는 나무에서 내려와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겼다. 사냥의 시작이었다.

 

* * *

 

 헝거게임 36시간째. 대포는 일곱 번이 더 울렸다.

 한 소녀가 물가에 웅크려 앉아 물을 뜨고 있었다. 동그란 이마를 가진, 순진해 보이는 소녀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저 소녀 혼자서만 둘을 죽이고 셋을 중상으로 만들었다. 소녀는 자연에 있는 재료만으로도 덫을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녀가 땅을 고르고 풀을 엮으면 그곳은 생지옥이 됐다.

 준수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그가 숲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그녀에게 이만큼 접근하지도 못했겠지. 소녀는 물을 뜨며 주변을 예리하게 살폈다. 그러나 모습을 숨기는 건 준수 쪽이 훨씬 능했다. 준수는 화살촉을 날카롭게 겨누며 숨을 멈추었다.

 이제 아레나에는 다섯 명이 남아있었다. 저 소녀를 죽이고 나면 넷이 남는다. 준수, 영중, 그리고 1구역에서 온 페어. 준수는 소녀가 물통을 잠그는 찰나의 순간을 노렸다. 시위를 놓자 화살이 번개처럼 날아가 소녀의 머리통에 꽂혔다. 소녀는 물통을 쥐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고통 없는 죽음이었다. 아니, 고통 없는 죽음이었기를 바랐다. 준수는 또 한 번 쏘아지는 대포 소리에 손끝을 잠시 떨었으나 이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죄책감은 사치였다.

 여태까지 넷을 죽였으니 이제 와서 특별히 사죄하는 것도 우스운 기만이었다.

‘전영중은 몇 명을 죽였을까. 그 녀석 안 그런 척해도 마음이 약해서…….’

 준수는 고개를 도리 저었다. 그가 알고 있던 영중과 지금의 영중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을 때 순진하게 달아오르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처음 그걸 봤을 때는 실수했다는 생각마저 했을 정도였다. 준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전영중을 죽여야 했다. 그는 특수한 훈련을 받은 조공인이었다. 이런 마음으로는 자신이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마음을 지워야 했다. 그래야 전영중을 죽일 수 있었다.

 준수는 자신이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 생각에 몰두했다.

부웅!

 머리 위로 도끼가 내리 찍히기 직전까지도 영중을 죽여야겠다는 생각뿐이 없었다.

“멍때리길래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1구역의 페어였다.

 준수의 귓바퀴 끝이 찢어지며 상처를 남겼다. 입술을 바득 깨물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게 기적이었다. 준수는 곧장 몸을 물리며 활시위를 당겼다. 아직 활을 손에 쥐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들도 곧장 덤벼들었을 테고 준수는 저 도끼에 당하고 말았겠지.

 준수는 다시 한번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조금 전까지는 그가 사냥꾼이었지만, 이번에는 사냥감이었다. 저들은 준수를 죽일 때까지 절대로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준수는 순순히 사냥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 상황이면 잡생각이 들지 않아 편했다.

 그게 준수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는 도끼를 휘두르는 남자와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뒤에서 단도를 들고 덤비는 여자의 팔을 차서 단도를 빼앗았고, 그걸로 남자의 복부를 강하게 찔렀다. 그 순간에 여자에게 옆구리를 걷어차여 바닥을 굴렀다. 흙먼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오히려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동시에 고통은 둔해져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칼날을 맨손으로 붙잡아도 견딜만했다. 마치 온몸이 살아남고자 발버둥을 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특수한 훈련을 받은 페어를 혼자서 이겨내는 일에는 점차 한계가 왔다. 준수는 점차 자신이 사냥당하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 놈은 죽여야겠다.’

 준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남자 쪽인지 여자 쪽인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도 등 뒤로 도끼가 날아드는 것만은 알았다. 그래도 준수는 피하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사람을 죽이는 데 모든 것을 집중했다. 그가 죽음의 공포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끝이었다. 준수는 죽음을 각오했으나 기이하게도 그 무엇도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손아귀에는 이미 고통스러운 얼굴로 죽은 남자가 붙들려있었고, 등 뒤로는 누군가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성준수!”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언제부터인지 영중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 머리가 웅웅 울렸다.

  이 새끼를 죽여야 해.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어.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고, 고통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준수야, 정신 차려. 성준수!”

 그러나 준수는 그를 죽이지 못했다. 어린애처럼 울먹이며 달려오는 남자를 보는 순간 안도감이 밀려온 탓이었다. 준수는 실핏줄이 터진 눈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살았다.’

 적어도 전영중이 기절한 자신을 죽일 리가 없다고, 죽이더라도 자기 눈을 똑바로 보며 죽일 거라고……. 그런 바보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준수는 안심한 채 의식을 잃을 수 있었다.

 

* * *

 

 딸랑딸랑. 딸랑딸랑.

 준수는 청아한 방울 소리에 의식을 되찾았다. 폐부로 눅눅한 공기가 스몄고 시야에는 동굴의 새카만 천장이 비쳤다. 있는 힘을 죄다 쥐어짜 고개를 돌리자 동굴 입구 쪽에 영중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비가 내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뻗고 있었다. 먹구름 틈새로 비추는 빛이 희미한 까닭일까. 그 모습이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신도처럼 보였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를 내던 물건이 영중의 손바닥 위로 부드럽게 안착했다. 그는 물건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고 뒤로 돌았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자 영중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영중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준수를 조롱하듯 웃었다.

“준수야, 잘난척하더니 꼴이 그게 뭐야?”

“닥쳐, 골 울려.”

“골이 깨질 뻔했는데 울리는 것 정도는 참지 그래?”

 준수는 어째서인지 영중이 화가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행동거지에 조롱하는 말투였는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준수는 대거리를 할 마음이 쑥 가라앉았다. 그보다는 영중이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저건 아마도 스폰서가 보낸 지원물자였다. 준수 역시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 방울 소리에 구원을 얻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영중은 물건을 살펴보더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진통제…….”

“뭐가 문제야.”

“준수는 아픈 거 잘 참아서 이런 거 필요 없는데. 그렇지?”

 영중은 약 올리듯 말하면서도 준수의 턱을 붙들었다. 준수가 뭐라고 반항하기도 전에 턱이 살짝 비틀리며 입술 사이로 알약 몇 개가 들어왔다. 준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얌전히 그걸 받아먹었다. 아픈 걸 잘 참기는. 당장이라도 몸뚱이를 갈아치우고 싶어질 정도로 아팠다. 진통제를 준다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물론 준수의 시선에서는 조금도 고마운 기색이 읽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여전히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영중을 살폈다.

“……마지막 한 놈은 아직 안 죽었나보지?”

“도망을 잘 치더라고.”

“그래서 나를 살려두나 보네. 그딴 로맨스 작전 같은 거 이미 처 망한 거 같은데.”

 영중은 답하지 않고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영중은 준수가 진통제를 삼키는 걸 지켜본 후에 준수의 맞은편 벽에 기대어 앉았다. 준수는 침묵 속에서 영중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에게도 역경은 있었는지 찢어진 상의 사이로 붕대가 둘둘 감겨있는 것이 보였다. 다 해진 신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억센 풀로 묶어놓기도 했다. 반면에 영중은 오로지 준수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던 중 침묵을 깬 것은 영중이었다.

“지수는 잘 지내?”

“뭐? 갑자기?”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잖아.”

 영중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서로를 살려두고 있었으나 언젠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그 사실이 준수를 조금은 유하게 만들었다.

“……잘 지내. 너랑 나랑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우느라 정신없겠지만.”

“여전한가 보구나.”

 또다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영중은 자세를 바꿔 한쪽 무릎을 세우고 팔을 기댔다. 아까보다 더욱더 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세여서 부담스럽기도 했다.

“준수는 우승하면 지수부터 의사한테 보여주겠네.”

“당연하지.”

“캐피톨 의사는 대단해. 손이 날아가도 다시 붙여주니까.”

“……뭐?”

“지금 생각해보면 지수 병도 대단한 게 아닐 거야. 의사한테 보여주면 금방 낫겠지.”

“아니, 그 전에…….”

 손이 날아갔다는 게 무슨 말인지 듣고 싶었는데, 영중은 그 화제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손목을 한 번 빙글 돌린 후 짓궂다고밖에 할 수 없는 얼굴로 물었다.

“준수야, 우리 키스할까?”

“……섹스가 아니고?”

 준수의 물음에 영중이 야유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동굴에 우리밖에 없긴 하지만 여기저기 카메라 다 붙어있거든? 준수 생각하는 것 좀 봐.”

 장난스럽기까지 한 말투에 준수는 이마에 핏대를 세워가며 비난했다.

“이 씨발놈이. 네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

“준수야, 소리 지르지 마. 아무리 비가 와도 그렇지, 너무 조심성이 없다 너는…….”

 영중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고, 준수는 정도 이상의 빡침이 밀려와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졌다. 진통제를 먹었다고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약을 먹지 않는다면 몸은 계속해서 삐걱거리겠지.

 영중은 준수가 허우적거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키스하자. 너 이대로는 죽어.”

“씨발, 대놓고 그따위로 말하는데 물건을 보내주겠냐?”

“어, 우리 준수 TV쇼의 개념을 알고 있긴 하구나. 나는 준수가 하도 뻣뻣하게 굴어서 모르는 줄 알았어.”

 이쯤 되니 영중이 자신을 도와주려는 건지 빡치게 해서 죽이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준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영중이 준수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꺼져, 키스 안 해.”

“그러다가 너 죽어.”

“안 죽어, 씨발! 애초에 키스한다고 약 준다는 보장이 있긴 해?”

“준수야.”

“제발 좀 꺼져.”

“한 번만 안아보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준수의 고개가 매섭게 돌아갔다. 영중은 여전히 준수의 곁에 얌전히 앉아 한 쪽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제야 영중의 손목에 팔찌처럼 둘러진 긴 흉터가 보였다.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영중이 받았다는 특수한 훈련이 그저 개같이 뛰고 개같이 구르는 게 아닐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뒤늦게 와닿는 현실도 있는 법이다. 뽑기 상자에 이름을 넣고 나서야 헝거게임에 공포심을 느꼈던 것처럼…….

 준수가 동정심을 느끼는 걸 귀신같이 알았던지, 영중은 준수의 시야에 제 얼굴을 집어넣고 다시금 말했다.

“이 게임 끝나면 너 죽을 텐데 한 번만 안아보자.”

“……죽는 건 너지. 난 살아남을 거니까.”

 준수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몸이 이 지경이어도 준수의 기개는 꺾일 줄을 몰랐다. 영중은 그 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알겠어. 한 번만 안아주면 내가 약 구해다 줄게.”

“무슨 수로.”

“무슨 수든 내겠지? 내가 준수도 아니고…….”

 이 새끼는 사람을 끝까지 무시했다. 준수가 들어줄 기미가 없어 보이자 영중은 무언가 생각하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윽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맹세할게. 새 둥지에 숨겨놓은 보물에 걸고.”

 준수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는 경악으로 물든 시선으로 영중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영중의 목을 조를 것처럼 분노에 가득 찬 것 같기도 했고, 아주 그리운 무언가를 만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준수는 만면을 구기며 무언가를 버럭 외치려다가 영중을 와락 끌어안았다. 영중은 깜짝 놀라 뻣뻣하게 굳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머뭇머뭇 준수를 마주 안았다.

 준수는 영중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며 으르렁거렸다.

“개 같은 새끼. 당장 죽여버릴까…….”

“하하…….”

 영중의 웃음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준수를 품에 안은 팔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이토록 애달픈 몸짓이라니. 캐피톨은 물론이고 준수까지 그에게 속아 넘어갈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게 연기가 아니라, 그저 단 한 번, 준수를 끌어안아 보고 싶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용서 안 해. 절대로.”

“응…….”

 영중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며 자꾸만 흘러 내려가는 준수의 몸을 추슬러 올렸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마주 보다가 이끌리듯 입을 맞췄다. 영중은 준수의 등을 둥글게 쓰다듬으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준수의 입술을 깨물지도 않았고, 그의 턱을 억지로 붙들지도 않았다. 마치 둥지에 숨겨놓은 초콜릿을 조금씩 빨아 먹듯,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영중은 이 세상 모두를 속일 완벽한 배우였다.

 

* * *

 

 펑!

 준수는 대포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남은 사람은 셋이었다. 자신이 살아있었으니 죽은 사람은 1구역의 남자와 영중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영중은 자신의 곁에 있으니…….

‘아니. 없다.’

 준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멈출 수 없었다. 영중이 자리에 없었다. 준수가 잠든 사이에 동굴을 빠져나간 것이 분명했다. 준수는 어금니에 힘을 주며 아득바득 움직였다. 다행인 것은 간밤에 영중이 보여준 완벽한 연기가 캐피톨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영중은 새 둥지에 건 맹세가 무색하지 않게 약을 구해다 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준수는 동굴 벽에 기대어진 활과 화살을 어깨에 짊어지고 영중의 흔적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영중이 죽었다면 또 모를까, 살아있다면? 준수는 지금 그에게 살아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러 가는 걸까? 아니면 싸움에 지친 그를 죽이러 가는 걸까? 준수는 스스로도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무작정 달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준수가 영중을 발견한 것은 사방이 뻥 뚫린 평원에서였다. 풀밭 위로 바람이 불 때마다 피 냄새가 풍겨왔다. 영중은 시체를 앞에 둔 채 양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전영중이 살아남았다.

 그 사실에 안도와 쾌감을 느낄 새도 없이, 영중이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피 묻은 단도가 들려있었고, 칼날은 그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저 새끼가!”

 준수는 곧장 시위를 당겨 영중을 겨누었다. 칼날이 영중의 목을 찌르기 직전, 화살이 그의 손등에 꽂히며 단도가 땅으로 떨어졌다.

“전영중!”

 준수는 야차처럼 매서운 얼굴로 그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영중은 차가운 얼굴로 땅에 떨어진 단도를 다시 주워 들려고 했다.

“이 씨발 새끼가!”

 준수는 영중을 향해 온몸을 내던졌다. 영중은 단도를 줍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렸고, 준수는 그걸 쳐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돔 안에서 두 사람은 각각 죽기 위해, 또 살리기 위해 죽자 살자 달려들었다. 이제 막 상처를 입은 자와 이제 조금 치료가 된 자의 싸움은 멋이라고는 없어 개싸움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준수는 영중의 코가 삐뚤어지도록 그를 팼고, 영중은 준수가 짐 덩어리라도 되는 양 있는 힘껏 내던졌다. 영중이 잊은 것이 있다면 어린 시절, 준수는 단 한 번도 영중과의 개싸움에서 진 적이 없다는 거였다.

 결국 단검을 차지한 것은 준수였다. 그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고르며 단검을 치켜세웠다. 그는 날카로운 날을 자기 목에 바짝 가져다 댔다. 어찌나 겁이 없던지 벌써 목덜미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준수는 힘 하나 남지 않아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씨발, 네가, 지금 제일, 하, 무서운 게 이거지?”

“준수야, 준수야……. 제발…….”

 영중은 피가 쏟아지는 손을 벌벌 떨며 애원했다.

“제발, 그거 내려놔. 이제 다 끝났잖아. 제발…….”

 제 목숨이 위협받았다면 애원하지 않을 녀석이었다. 그는 오로지 준수의 목숨 앞에서만 이토록 간절하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됐다.

 이제는 알겠다. 지난밤, 지원품을 받기 위해 두 팔을 하늘로 뻗던 영중의 존재가 신실한 신도처럼 보인 까닭을……. 예정대로라면 18살에 튀어나와야 할 새끼가 왜 1년 일찍 자원했는지를. 왜 도움도 되지 않을 준수에게 스폰서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는지를.

 어째서 입을 맞출 때 영중의 몸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는지, 그 모든 것들을 말이다.

“……처음부터 죽을 작정으로 나왔어?”

“준, 수야…….”

 영중은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그는 무릎걸음으로 애타게 다가와 놓고는 준수에게 차마 손도 대지 못했다. 준수는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느끼며 버럭 외쳤다.

“내 뒤치다꺼리하려고 나왔냐고! 어울리지도 않게 섹스니 뭐니, 지랄한 것도 다 이거였어? 한 번만 안아달라고 한 것도, 전부 다! 나 살리고 너는 뒤질 작정이었냐?”

 영중은 여전히 준수에게 손을 뻗으며 힘겹게 말했다.

“그러게 조금만 더 자고 있지 그랬어…….”

 그건 준수가 원한 답이 아니었다. 그는 목덜미에 대고 있던 단도를 멀리 던졌다. 그러자 영중이 크게 안도하며 한쪽 무릎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음 순간, 준수는 자신의 화살통에 남아있는 단 하나의 화살을 빼며 영중과 마주 본 채 무릎을 꿇었다.

“네 뜻대로는 못 해주겠어.”

“……지수를 생각해.”

“지수는 이미 돌봐줄 사람이 있어. 문제는 너지.”

 준수는 화살을 오른손으로 꽉 쥐고 다른 손으로는 영중의 뺨을 단단히 붙들었다.

“같이 죽자.”

“뭐?”

“너만 살아나가래도 말 안 들을 테고, 나만 살아서 나가기도 싫어졌어. 이 개 같은 게임, 엿이나 먹으라고 해.”

“안 돼.”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영원히 여기 있다가 굶어 뒤질까? 아니면 내 손에 죽을래?”

 영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준수는 영중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씩 웃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답지 않은 호기로운 미소였다. 준수는 영중의 목뒤에서부터 화살촉을 겨누며 침착한 말투로 그를 달랬다.

 가만히 있어, 조준하기 어려워. 그냥 나만 쳐다보고 있어. 넌 겁쟁이니까. 아픈 건 금방이야. 내 실력 알지? 나 똑바로 봐. 힘들면 내 이마에 기대. 그래. 그렇지. 잘하네.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정하기까지 한 투였다. 영중은 준수를, 준수는 영중을 바라본 채로 화살촉이 영중의 목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끼이이이익!

 날카로운 기계음 소리가 아레나 돔 전체를 울렸다. 두 사람은 귀를 막으며 몸을 움츠렸다. 상황에 의아함을 표하기도 전에 게임메이커의 성난 목소리가 방송됐다.

“그만! 멈추세요! 이번 헝거게임의 우승자는 이 시대 최고의 연인으로 정해졌습니다! 아름다운 연인에게 힘찬 박수를!”

 두 사람에게는 박수는커녕 작은 환호성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딴 것보다는 하늘을 울리는 헬기 소리가 더욱 반가웠다.

 살아남았다. 그것도 둘이 함께.

 준수는 영중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넌 가서 두고 보자.”

“……준수야,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닥쳐, 나도 알아.”

 이런 식으로 헝거게임을 빠져나간 사람은 없었다. 승자는 반드시 한 명뿐. 그것이 캐피톨에 열두 개의 구역에게 허락한 만큼의 희망이었다. 두 명이 빠져나간 이상 그들을 기다리는 건 해피엔딩이 아닐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확실하게 살아남았다. 그러니 불확실한 죽음을 두려워할 때가 아니었다.

 영중은 헬기에서 내려온 밧줄을 단단히 붙들고 준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준수는 그 손을 붙잡으며 영중에게 바짝 붙었다. 영중은 뜨거운 온기를 품에 가득 안으며 길고 긴 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준수를 다시 한번 품에 안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2구역을 떠나던 그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날도 영중은 굶주리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뽑기 상자에 넣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평소와 달리 하얀 알약이 몇 개 들어있었다. 영중은 플라스틱병에 들어있는 알약을 들여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진통제잖아…….”

 준수의 여동생 지수는 자주 아팠다. 의사에게 보여줄 돈이 없어서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로 그냥 앓았다. 진통제로는 병이 낫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그래도 고통을 줄여줄 수는 있으리라. 영중은 신이 나서 준수네 집으로 달려가다가 준수의 집 앞에서 괴롭힘을 받는 지수를 발견했다. 평소에는 준수 눈치 보느라 바쁜 녀석들이 준수가 숲에라도 가는 걸 본 모양이었다.

 영중은 녀석들 사이로 끼어들며 지원 물품은 지수에게 빠르게 넘겼다. 말다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준수가 없다는 사실에 기세등등했고,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영중은 준수가 먼저 주먹을 날리는 탓에 싸울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니까. 영중은 그 애들을 죽도록 팼다. 다시는 준수가 없어도 지수를 건들 생각이 나지 않도록 돌로 어깨를 내려찍었고, 몰래 지수에게 덤벼드는 녀석을 돌계단 아래로 밀쳤다. 악착같이 싸우고 나니 몇 놈은 도망을 가고 몇 놈은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영중은 숨을 헉헉 몰아쉬며 지수 쪽을 돌아보았다.

“지수야, 괜찮…….”

 지수의 곁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12구역에서는 볼 수 없는 두툼한 체구에 인상이 사나웠다.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은 영중의 영혼까지 샅샅이 살피는 듯한 눈동자였다. 남자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영중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너, 쓸만하겠구나.”

 남자는 영중에게 자신이 헝거게임의 우승자고, 자신의 후계자가 될 만한 아이를 찾는다고 설명했다. 자신을 따라오면 헝거게임에서 우승할 수 있을 거라고, 너라면 분명 우승할 수 있을 거라며 바람을 실컷 넣었다.

 당연하지만 영중은 헝거게임에 참가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모르는 남자를 따라가 가족들은 물론이고 준수와 헤어져 지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중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간을 끌면 준수가 온다. 이 남자는 준수를 보면 내가 아니라 준수를 데려갈 거야. 어린 소년은 확신했다. 이 남자가 찾아 헤매는 가장 이상적인 소년이 바로 준수라는 것을. 준수가 싫다고 해도 반드시 그 애를 데려갈 거라는 걸…….

 그러므로 영중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그때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킬 것이 있는 자는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영중은 헬기에 올라탄 이후로도 준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제는 생각을 달리 해야 했다. 지킬 것이 있으니 더욱 강해져야 했다. 준수의 마음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영중의 손을 강하게 붙들고 있었으므로.

 영중은 방금까지 자신들이 머물던 아레나 돔을 내려다보며 맹세했다. 우리가 둥지에 숨긴 것들을 영원히 지켜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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