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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수야, 입 더 벌려야지.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손가락이 입 안을 좆대로 헤집어대고 있었다. 성준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 혀를 굴려 위치를 가늠했다. 그리고 힘껏 물어 뜯었다. 아. 녀석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손을 거두어 갔다. 투박하게, 그러나 보기 싫지 않게 뻗은 손가락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녀석은 잠시 제 손과 성준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 장래희망이 개새끼인 줄은 몰랐는데.

- 허세는 지랄. 뒤지기 싫으면 이거 풀어.

성준수가 은색 수갑을 거세게 내리쳤다. 이미 긁힌 자국이 선연한 손목은 단단히 결박된 상태였으며, 눈앞에는 새하얀 접시들이 하염없이 쌓아 올려져 있었다. 녀석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아, 해 봐. 기분 좋게 해 줄게.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듬뿍 크림을 푸더니 성준수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이 씨발 새끼가! 성준수는 새하얀 우유 크림이 목 뒤로 부드럽게 흘러 들어간 것을 느꼈다.

- 비싼 게 맛있긴 해. 그치?

녀석은 제 손에 남은 크림을 조심히 핥아먹었다. 성준수의 지랄에도 눈길 한번 돌리지 않던 녀석이 문득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3

2

1

제로.

- 생일 축하해, 준수야.

순식간에 두 사람이 있던 공간이 어두워졌다. 타고 있던 열차가 터널 안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죄악 같은 선물이었다.

 

 

 

 

설국열차

 

 

 

바깥은 얼어붙었다. 지구는 빙하기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열차는 19년째 같은 철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일직선적인 형태의 열차는 그 자체로 계급을 상징하였는데, 머리 칸의 인간들이 스테이크를 썰고 있을 때 꼬리 칸의 인간들은 정체 모를 단백질 블록을 씹어 먹었다. 턱이 빠져 나가도록 꼭꼭. 그런 곳에서 성준수가 태어났다.

사실 성준수의 출신을 따지자면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성준수의 부모는 본래 머리 칸 출신이었으나 출생을 도모했다는 죄로 꼬리 칸으로 쫓겨난 인간들이었다. 하기는 자업자득이려나. 자원이 한정된 열차 내에서 아이를 낳는 행위는 중죄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성준수는 태어난 순간부터 죄인 신분이었다.

그러나 성준수는 그런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괜찮은 유년기를 보냈다. 성준수의 부모는 머리 칸에 오랜 친구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관리’를 명목으로 종종 성준수의 가족을 불러들였다. 성준수는 그들의 배려를 받아 오렌지빛 조명 아래에서 식사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은 언제나 성준수의 가족이 급히 음식을 삼키는 것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신들이 선한 행위를 행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묻어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성준수는 그들의 눈알에 나이프를 꽂고 싶었다. 그들의 목덜미를 긋고 테이블보로 덮어 버리고 싶었다. 행동으로 즉시 옮기지 않은 것은 오직 굶주린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성준수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핏물 고인 접시를 내려다보던 성준수는 문득 칸 너머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성준수는 식기를 내려놓은 뒤 그들의 시선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 미닫이 문을 앞에 두고 귀를 기울였다. 소음이 들렸다.

노크했다.

똑.

똑.

똑.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열린 문 틈으로 보인 것은 드넓은 침대와 이름 모를 건반 악기였다. 그리고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낯선 소년이었다. 소년은 꽤나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눈을 맞추다가 간신히 내뱉어 온 말이란 간결하고도 수줍은 것이었다.

- 안녕.

성준수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 그래, 안녕이다. 이 새끼야.

소년의 얼굴이 거세게 돌아갔다. 바닥에 쓰러진 소년은 잠시 제 뺨을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 그대로 성준수의 복부를 가격했다. 이 씨발 새끼가! 굉음과 거친 욕설을 들은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녀석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를 보고 소리질렀다.

- 아들!

아들? 뒤늦게 달려와 성준수를 일으킨 가족들이 멍한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아들이라니. 눈앞의 소년은 성준수와 고작해야 한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의 아들이라면, 소년 역시 열차에서 태어난 것이라면, 그들은 성준수의 가족들처럼 꼬리 칸에서 머물러야 마땅했다.

성준수의 가족이 해명을 요구한다는 듯 입을 다물고 바라보자, 그들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해 왔다.

- 영중이는 5월에 태어났어. 그러니까, 열차에 타기 직전에.

고작 반년의 차이. 성준수는 12월 생이었다. 그까짓 태어난 타이밍으로 뒤바뀐 운명을 원망해야 하는 것이라면, 성준수는 누구를 단두대에 세우고 책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준수는 그날부로 다음 칸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누구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영원히 꼬리 칸에 남기를 자진했다. 열차가 달리듯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몇 번째 터널을 지나야 열차가 한 바퀴를 되돌아오는 것인지 계산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성준수는 성인이 되기까지 일주일 가량을 앞두고 있었다. 이 말은, 동갑인 소년 역시 불안정한 청소년기를 끝마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성준수가 그간 녀석을 전혀 떠올려 본 적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꿈에 나올 때마다 줘 팬 경력만 10년이었다. 이후로 얼굴을 맞댄 적 없으니 꿈에서도 매번 애새끼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양심에 찔리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성준수는 꼬리 칸 바깥으로 발을 내딛을 의향이 좆도 없었으나 녀석과 마주친다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물론, 그건 성준수의 주관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도 존나게.

자만한 결과로 성준수는 호출과 동시에 멱살 잡혀 복도로 내던져지게 되었다. 역무원인 줄로만 알고 따라 나간 새끼가 그것보다 더 수상하고 꺼림칙한 새끼였다는 것이 화근이었다. 복도에는 수명을 다한 조명이 힘없이 깜박거리고 있었으며, 서리 낀 창문이 금방이라도 빠질 듯 덜그럭거리고 있었다.

- 안녕.

- 뭐?

- 이렇게 말하면 기억나려나.

녀석은 무릎을 굽힌 뒤 정갈하게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졌다. 눈이 마주치자 말려 올라가는 입술. 의심스러울 정도로 깨끗하고 각이 잡힌 재킷이나 넥타이. 녀석이 손목 부근에 매달린 단추를 툭, 툭 가볍게 풀어냈다. 나 그때 되게 용기내서 인사한 거였는데, 안 받아 줘서 속상했거든. 그 순간 주마등마냥 눈앞을 스쳐 지나간 애새끼의 얼굴이 있었다. 야, 너. 성준수가 입술을 뗐을 때였다. 철컥.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 뭐야, 씨발!

- 뭐긴 뭐야, 수갑이지. 뭘 배운 적이 없어서 모르나?

녀석이 살갑게 웃어 보였다. 너 내일 생일이라며. 내가 선물로 뭐 가져왔는지 같이 안 볼래.

- 이거 풀고 싶으면 이번에는 받아 줄 수밖에 없겠네.

이런 씹, 개또라이 새끼를 봤나.

*

성준수는 머릿속으로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저 새끼의 목을 비틀고 탈출할 수 있는 확률에 대해. 모 아니면 도였고, 1 아니면 6이었다.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6.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1.

다른 게 아니라, 전영중은 수갑을 풀어 줄 생각이 일절 없어 보였다. 성준수는 현재 머리 칸 객실에 처박히듯 방치되어 있었다. 전영중은 익숙하게 환복한 뒤 보드 게임을 굴리기 시작했다. 준수도 할래? 좆 까. 참, 성격하고는. 머리 칸은 기억 속의 그대로, 경험해 보지 않은 자가 쉽게 흉내낼 수 없을 법한 다정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니 기분이 수직 낙하하지 않을 수가.

- 준수야, 눈알 굴리는 거 존나 티 나.

- 뽑든가.

- 너도 참. 내가 그런 잔인한 짓을 어떻게 해.

전영중이 보드 위의 말을 옮기며 말했다. 성준수는 가장자리를 둘러싼 말들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벽으로 상체를 기대었다. 내려다보듯 전영중을 바라보더니 싸늘한 조소를 흘렸다.

- 그래. 존나게 도련님이었지, 너.

- 아무래도.

- 그래서 니네는 사람 죽이는 게 그렇게 쉬웠냐?

게임이 멈추었다.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두 사람의 피부로 와 닿았다. 당장이라도 쫓겨날 듯 위태로운 위치에 있는 말들. 그것들은 빛을 맞아 본 적 없는 것처럼 검었다.

그것은 곧 꼬리 칸의 사람들을 상정했다.

지구상의 모든 것이 얼어붙은 지 20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열차에는 연료부터 식량까지 아깝지 않은 것이 하나 없었고, 머지 않은 미래에 애꿎은 손가락만 쪽쪽 빨아대고 싶지 않았던 몇 인간들은 무척이나 효율적이고 간편한 방법을 떠올려냈다. 그게 무어냐 하면 입을 줄이는 것. 대상은 당연하게도 꼬리 칸 인간들이었다.

그리하여 현재 꼬리 칸에 남아 있는 성인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성준수는 꼬리 칸을 떠나게 된 이들의 생사여부를 명확히 알 수 있었는데, 네 번째 터널을 지나서 언덕을 넘을 때 열차에서도 볼 수 있는 거대한 눈덩어리들이 있었다.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는 눈덩어리들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 인간이 맞았다. 정확하게는 인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오래 전, 가장 먼저 열차 밖으로 내던져진 그들은 몸을 일으키기도 전 그대로 얼어 버렸다. 성준수는 두려움에 질려 새파래진 얼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 준수 너는 내가 사람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전영중이 익숙하게 턱을 괴며 물었다.

- 그럼 오히려 나한테 잘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상당히 불손한데.

근데 가만 보니까 이 새끼가, 성준수가 테이블을 뒤집어엎을 듯 튀어 나갔다. 보드 판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가지런히 놓여 있던 말들이 도미노처럼 쏟아져 내렸다. 성준수는 여전히 묶인 손목으로 녀석의 멱살을 비틀 듯 거칠게 쥐어 잡았다.

- 야, 니가 존나 곱게 자라서 뭘 좀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 응.

- 내가 여기서 너 죽여 버리고 나갈 수 있는 거 아냐?

- 그래. 너 성격 나빠서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근데 이것 좀 놓지. 전영중은 터무니없이 무심한 얼굴로 제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성준수의 머리통을 빠르게 테이블 위로 찍어 내렸다. 쾅! 이런 씨발. 전세 역전이었다. 성준수가 처박힌 고개를 돌리며 욕지거리를 씹어댔다. 전영중은 어깨를 짓누르며 성준수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붙였다. 부러 간지럽게 속삭여댔다.

- 나 너랑 별로 싸울 생각 없어.

- 대가리 처박고 할 말이냐, 그게?

- 응, 내가 미안.

성준수는 등 뒤에서부터 뻗어져 온 뜨거운 손이 제 입술을 지분거리는 것을 느꼈다. 윽. 슬며시 벌어진 입에서 메마른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러는 거 알면 부모님이 존나 기특해하시겠다, 새끼야. 명백한 조롱이 섞인 어조에 전영중은 말없이 성준수의 위로 상체를 포개었다. 테이블이 덜컹거리며 덩달아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흔들렸다.

- 준수야, 네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하나만 정정하겠는데 나 곱게 자란 적 없어.

- 지랄하지 마.

- 사람 죽인 적은 더 없고.

- 하나만 정정한다며.

- 아무튼.

열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음 외에 고요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성준수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곧 미간을 부드럽게 문질러 오는 손길이 있었다. 내가 갑자기 너 찾은 이유 안 궁금해? 답지 않게 무게를 잡던 전영중이 부드러이 물어 왔다. 어, 존나. 성준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귓바퀴 너머에서 픽, 하고 가벼운 실소가 들려왔다.

- 너무 그러지 마. 이건 궁금해해줘.

재촉 혹은 안달. 사람을 달래려는 것 같은 목소리.

- 너한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성준수는 그것이 같잖아 죽여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 장담하는데,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야. 이 일을 했는데 네가 죽으면 나도 죽거든.

무식하게 크기만 한 손이 제 목덜미를 주물거리고 있었다. 성준수는 좆같은 기분을 삭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1과 6. 그중 전영중은 1이었던 걸까.

*

조종실로 가야 해. 전영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명징한 것이었다. 수갑을 푼 성준수는 몇 번 손목을 꺾어대더니 그대로 전영중의 턱을 강타했다. 아. 짧게 신음을 흘린 전영중이 제 뺨을 만지더니 웃음소리를 냈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 난다, 그치.

전영중은 여유로이 걸음을 옮겨 서랍 깊숙이에서 총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철컥 소리를 내며 장전하더니 정확히 성준수의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피부 위로 온몸의 감각이 곤두설 만큼 차게 식은 쇠붙이가 느껴졌다.

- 떼, 씨발롬아.

- 준수가 참고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너한테 이렇게 할 수 있어. 근데 너는 안 돼.

- 너는 태어나기 전부터 죄인이었잖아.

성준수는 그 순간 온몸의 열이 죄다 뇌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전영중이, 그따위 호칭을 입에 올린다는 게 이렇게 좆같을 수가. 이 개새끼가. 전영중의 복부를 거세게 걷어차자 충격과 함께 총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야…. 전영중은 제 명치께를 살살 문지르더니 중얼거렸다. 이건 농담 아니었는데.

- 너, 성인 되면 바로 열차에서 나가기로 되어 있었거든.

전영중이 턱을 까닥이며 미닫이 문 너머를 가리켰다. 성준수는 표정을 구긴 채 녀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굳게 닫혀 있는 문. 함부로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열차 내에 존재하는 일종의 약속이었다. 객실 너머에서 어떤 소음이 들려도 주인의 허락을 맡지 않고서는 문을 열 수 없었다. 물론 이때의 객실에 꼬리 칸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성준수는 어릴 때부터 별종이었던 셈. 전영중이 사용하는 객실 앞으로는 두 개의 칸이 더 존재했고, 그 끝에 도달해서야 조종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조종실에는 전영중은 물론, 웬만한 놈들도 닿아 본 적이 없었다.

전영중은 떨어진 총구를 조심히 주워 성준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진득한 손길로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주더니 기어코 방아쇠 위에 검지를 올려놓았다. 잘 봐. 나직이 속삭인 전영중이 손을 겹쳐 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성준수는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적막을 깨뜨리며 울려 퍼지는 총성. 유리컵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

- 신기하지. 이래도 아무도 안 와.

- 야, 너….

- 여기는 우리밖에 없어.

그래도 예외가 하나 있다면 역무원이 문을 두드릴 때이려나. 내가 왜 굳이 정복을 입고 찾아갔을까. 설마 너 기분 좋게 하자고 코스프레 하고 놀러 갔겠어. 알았으니까 또 개빡친다는 표정 하지 말고. 아무튼, 역무원이 차장 이름을 들이대면서 순찰을 돌 때가 있어.

- 그럴 때는 노크 세 번이 끝나기 전에 문을 열어 줘야 해. 열차의 안전을 위해서. 열차의 보존을 위해서.

-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데.

- 글쎄, 그건 아직 해 본 적이 없어서.

그 사람들한테도 총이 있거든. 전영중이 검지를 가볍게 접었다가 펴며 눈을 맞추었다.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따라 붙을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성준수가 어둠 속에서 키워졌다고 해도 또 아주 멍청한 새끼는 아니라서.

- 약속할게.

내가 객실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하는 동안 너는 앞으로 가. 시키는 일 하나만 하면 살려 줄게.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쯧. 성준수는 혀를 차더니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헤집었다.

- 나는 내 목숨 구한다고 쳐. 네가 조종실이 필요한 이유는 뭔데.

-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 내가 네 뒤통수 후려칠 가능성은 고려 안 해 봤냐?

전영중이 입술을 다물었다.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럼 죽는 거지, 뭐. 이걸 블랙 코미디라고 하는 거라면 전영중은 개그에 소질이 없다 못해 재능이 소멸한 새끼인 게 틀림없었다.

하여 성준수는 오직 추위를 견딜 목적으로 입던 천 무더기를 버리고 와이셔츠 단추를 꿰고 있었다. 전영중은 침대에 걸터앉아 환복하는 성준수의 등을 눈에 담고 있었다. 뭘 봐. 그냥 눈 호강 중. 아주 지랄을 해라. 지랄을.

전영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성준수의 등 뒤로 다가왔다. 두 손가락으로 왁스를 푸더니 손바닥 위에 문질렀다. 그리고는 익숙하다는 듯 성준수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겨 주며 중얼거렸다. 생일 아니랄까 봐 주인공 같다, 그치.

- 사람은 죽이면 안 돼. 알겠지.

덤덤한 말투로 그런 말을 잘도. 성준수는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똑똑히 눈에 담아 둘 수 있었다. 전영중이 그러했듯 어느 누가 보아도 수상하고 꺼림칙한 역무원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성준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열차는 또 한 번의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

기억해.

너랑 나는 공범인 거야.

싫어하는 나를 흔들 수 있는 기회가 네 선물이야.

준수야, 너는 이제부터 나의 유일한 머리야.

이 망해 버릴 열차 안에서.

*

성준수는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문 너머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등을 돌리자 전영중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해석하자면 어쩌라고, 라는 뜻. 저 씹새끼가…. 성준수는 중얼거린 뒤 조심히 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것은 레이스가 가득한 방이었다.

레이스 식탁보. 레이스 커튼. 레이스 캐노피. 눈을 치켜뜨고 돌아봐도 사람은 없었다. 성준수는 여전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전영중과 시선을 맞추었다. 잘 다녀와. 입 모양으로 말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서서히 문이 닫혔다. 남은 것은 오로지 저뿐.

어쩐지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성준수는 도둑질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실례합니다. 계세요? 발을 내딛을 때마다 위태롭게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더 깊숙이, 더 앞으로 걸어 나가자 이윽고 보인 것은 진녹색의 판이었다. 판 위로는 새하얀 분필로 선이 그어져 있었다.

//// //// //// //// //// …

그 표식들은 칠판을 가득 채우다 못해 벽으로까지 넘어가 있었다. 방의 주인은 날짜를 세고 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머리를 때리듯 시야에 들어찬 문구가 있었다.

문은 어디에나 있다.

성준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 씨발, 이게 뭐야. 침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바닥에 사람이 엎어져 있었다. 그에게서 썩은 내가 풍겼다. 그의 주변으로는 벽을 채운 표식만큼이나 새하얀 알약들이 너저분히 늘어져 있었다. 우욱. 성준수는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토기를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사람은 죽이면 안 돼. 그 말은 무언가 예감하고 있었던 걸까. 그러나 묻고 싶어도 성준수는 돌아갈 수 없다. 성준수는 한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은 채 재차 걸음을 독촉했다. 또 다시,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 문을 앞두고 노크했다.

똑.

똑.

- 누구세요?

이번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다행인가, 아니 미친, 이게 다행이 맞나. 성준수는 고인 침을 삼키며 총기에 손을 올렸다. 차장님 호출을 받았는데요. 지나가게 문 좀 열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겨우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지어내며 답하자 얼마 가지 않아 문이 열렸다. 중년쯤 되었을까, 동물 털 목도리를 두른 사람이 서 있었다. 사냥감을 내려다보듯 매서운 눈빛이 위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예, 그러시겠죠. 성준수는 속으로 생각하며 그의 동의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침입을 허락한다는 것처럼 문을 열어 둔 채 등을 돌렸다. 성준수는 그를 따라 느릿하게 내부로 들어섰다. 내부는 이전 객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하고 있었데, 공간을 둘러싼 벽마다 금빛 눈의 맹수를 그린 거대한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그는 찬장에서 찻잔을 꺼내더니 가벼운 몸짓으로 의자에 앉았다. 괜한 낭비가 없는 움직임으로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따라내더니 입술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성준수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저기요. 성준수가 고개를 돌렸다. 제가 열차에 타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아세요. 뭔 뜬구름 잡는 개소리야 갑자기. 성준수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불쑥 일어나 주전자를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문득 성준수의 머리 위로 들어 있던 액체를 모조리 쏟아 부었다.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성준수가 이를 악문 채 뚝, 뚝 젖은 머리카락 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면 말했다.

- 경매를 했어요.

- …….

- 그렇게 돈을 벌었죠.

작품을 사려는 체하면서 입만 번지르르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내 말은 재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 재주가 나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나이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나이프는 조명 빛에 비추어져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한순간이었다. 그가 성준수를 찔렀다. 깊숙하게. 빠르게. 미처 의식하지 못한 속도로.

이런 씨이발…. 성준수가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불찰이었다. 높으신 분들은 사람 배때기 쑤실 줄 모를 줄 알았지. 어디 하나 나사 빠진 게 분명한 착각이었다. 이 열차를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데 감히.

옷만 입는다고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란다. 이 하찮은 것아. 그는 가벼운 손길로 나이프를 내려놓더니 손수건에 손을 문질러댔다. 간신히 더듬거리며 복부를 매만지자 붉은 피가 묻어 나온 것이 보였다. 성준수는 한쪽 눈을 찌푸리며 실소를 흘렸다. 그렇지. 그랬으면 내가 너희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겠지.

- 야.

성준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배운 대로 장전한 뒤 총을 꺼내 들자 내내 여유로워 보이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갔다. 너 어떻게 그걸…. 성준수는 대답해 주는 대신 벽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이동했다. 걸을 때마다 짓이긴 입술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죽여 버리고 싶다. 당장이라도 저 눈알 두 개에 탄환 하나씩을 박아 준 채 무릎 꿇리고 싶다. 오래 전부터 열망하던 소원이다. 성준수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 조종실이 어디야.

그러나 성준수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니까, 말할 수 있었다.

- 문 열어, 이 새끼야.

하찮은 것이랑 저승길 동무 하고 싶은 거 아니면.

*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전영중은 보드 판 위에 있던 말들을 전부 힘없이 쓰러트렸다.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했다. 문과 문 너머, 객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까지 총성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

성준수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고작 나흘 전에 알게 되었다. 부모의 대화를 통해서였는데, 머리 칸 사람들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부친은 외투를 벗으며 그리 말해 왔다. 일주일 뒤면 성인이라고 하니, 그 안쓰러운 애는 생일이 곧 기일이 되겠어. 전영중은 익숙한 이름을 듣는 순간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애. 12월 혹한기에 태어난 애.

앳된 얼굴. 그럼에도 분명한 살기가 서린 눈빛. 성준수를 떠올리면 함께 새겨지는 것들은 그런 것이었다. 성준수가 채택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성준수의 가족을 제외한 열차 내의 모든 인간들은 성준수의 탄생을 조금도 축복하지 않았다.

-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그러지 않았을 걸.

태어나는 시기를 감히 사람이 정할 수 있는 것이었나. 전영중은 그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전영중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오전이었다. 전영중이 졸린 눈으로 깨어났을 때 가족들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시계를 올려다보자 바늘은 6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침내 바늘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숫자 6이 된 이후에도 가족은 돌아오지 않았다. 열차가 터널 밖과 안 중 어느 곳을 달리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날이 저문 후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고민하는 사이, 전영중은 객실 너머에서 거대한 물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저기요?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다가간 전영중은 노크하려던 손을 멈추게 되었다. 열차에서의 사생활을 보장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어떤 소리든 못 들은 척해 주는 것이 예의. 그렇다면 전영중은 방금의 소리도 모른 척해야만 하는데.

 

불쾌한 예감이 몸을 타고 기어 오르듯 차오르고 있었다.

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 고작 문 하나를 두고 서로를 못 본 척한다는 게. 서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건너편에서 누구도 숨 쉬고 있지 않다고 여긴다는 게.

한번 느낀 이질감은 좀처럼 묻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영중은 중얼거리면서도 자신이 누구에게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전영중이 열차에서 만나 본 인간들 중 말을 놓을 수 있는 상대는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전영중은 성준수를 찾았다.

 

함부로 그 애를 살리고 싶다고 소원했다.

타이밍 좋게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전영중은 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고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기대했던 것처럼 녀석은 문을 두드리지 않고 걷어차듯 열어냈다. 그 거대하고 난폭한 굉음을 듣고서야 전영중은 시선을 옮겼다. 당장 쓰러져도 어색하지 않을 몰골을 한 성준수가 사람을 부축하고 있었다. 피 비린내가 났다. 붉은 발자국이 바닥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 설마 죽였어?

 

전영중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성준수가 도리질했다.

 

- 아니. 죄다 죽었어.

- 뭐?

언제나와 같은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잇따라 성준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 조종실에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어.

-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을 해.

- 니가 못 알아처먹고 있는 거지, 씹새끼야. 시체밖에 없었다고.

그게 무슨…. 전영중은 쉽게 말문을 열 수 없었다. 머릿속이 혼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준수는 집어 던지듯 제 뒤의 사람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에는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으며, 배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스스로를 찔렀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야, 일단 나 존나 뒤질 것 같으니까 소독할 거 있으면 좀 줘 봐. 전영중은 그제야 성준수의 물든 와이셔츠가 꼭 타인의 피에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준수는 소독약 뚜껑을 열더니 그대로 제 복부에 들이부었다. 윽, 씨발. 단단히 감싸 문 입술 틈으로 날것의 욕설이 새어나왔다. 대체 조종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전영중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말을 삼켰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성준수가 거품이 부글거리는 살갗 위로 붕대를 두르며 입을 열었다.

- 그중에 내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고 하면 어쩔래.

- 네가 아는 얼굴이 우리 부모님밖에 더 있을까.

전영중이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 차장님은?

- 제일 먼저 죽었어.

- 하하, 거짓말이지. 아버지는 차장님을 뵈러 다녀오겠다고 하셨는걸.

- 그래, 뭐. 뼈만 남은 게 차장이면 그것도 차장이겠지.

 

성준수가 문득 재킷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전영중은 건네받은 종이 위로 정갈하게 적혀 있는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열차를 운행하는 차장입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끼신다면 서랍을 열어 보십시오. 간결한 자기 소개로 시작한 이것은 유서였다. 부정할 것도 없었다.

 

차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열차가 멈출 것임을 예감했다. 설계 오류가 원인이었고, 열차에 올라타 있는 모든 이들의 죽음을 예고하며 회고하는 내용으로 종이는 빼곡했다.

- 확신하는데 이 열차는 곧 멈춰. 조종실에 들어간 순서대로 그걸 깨달았겠지.

 

성준수가 가볍게 고갯짓하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너는 그 서랍에 들어 있던 게 뭐였을 것 같냐. 전영중이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침대 위에 엎어져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정확히 터지기 직전까지의 속도로 심장이 뛰어대고 있었다. 속이 뒤틀려 먹은 것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가족이 죽었다. 조종실은 비워져 있었다. 열차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열차의 계급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열차는 지금까지 누구의 손 위에 있었던 걸까.

 

전영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봤다. 죽은 사람을 마주한 것은 제가 아닌데도, 꼭 죽은 사람을 본 것마냥 질려 있었다. 알고 있던 세계가 모조리 부서져 버렸을 때의 기분이란.

- 야.

- 미안, 믿기지가 않아서.

- 내가 하다하다 니 감정까지 고려해 줘야 하냐?

- 그러게.

 

전영중이 실없는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무덤덤한 투를 지어내고는 있었으나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돼서 어떡하지, 준수야. 나도 저 사람들도 네 손으로 죄다 죽이고 싶었을 텐데. 성준수가 조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어깨를 붙잡아 왔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올려 전영중의 한쪽 얼굴을 내리쳤다. 뻑,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전영중이 바닥 위로 쓰러졌다. 뒤늦게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는 언젠가와 같은 구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성준수는 눈높이를 낮춰 무릎을 굽히더니 전영중의 턱을 붙잡았다. 이 씨발, 힘을 실어 재차 녀석의 얼굴을 가격했다. 개좆버러지 같은 새끼들, 내가, 너희 같은 새끼들 때문에, 몇 년을. 성준수는 숨을 몰아쉬며 움켜쥐고 있던 멱살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몇 번의 주먹질을 얌전히 받아낸 전영중은 터진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고 내려다보았다.

- 나는 나갈 거야.

- 어디를?

- 밖으로.

-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성준수는 대꾸하는 대신 마구잡이로 옷장을 열어 젖히기 시작했다. 누구의 것인지는 가늠하지도 않고 꺼내 온 가죽 가방에 눈에 보이는 것마다 쓸어 담았다. 전영중은 당장 몸을 일으켜 성준수의 손목을 붙잡았다. 성준수는 지겹다는 듯 짐을 집어 던지고는 한 손으로 총구를 집어 들었다. 겨누었다. 전영중의 눈앞을 향해. 놔라, 쏴 죽여 버리기 전에. 단언컨대 그것은 간신히 분노를 눌러 담고 있는 목소리였다.

 

- 난 지금 이만큼 이성적일 수가 없어, 영중아.

 

전영중은 미동 없는 자세로 성준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조심히 손을 겹쳐 잡더니 방아쇠를 붙잡았다. 알고 있어. 더 할 것 없이 간략한 대답이었으나 의미만큼은 분명한 행위였다.

 

책임을 피할 생각이란 애초에 없었다. 전영중은 그런 놈이었다. 조종실이 목적이었으나, 차장이 죽은 열차는 조종실을 손에 넣지 않고도 뒤엎을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열차는 이미 끝을 향하고 있었다. 무엇도 바꿀 수 없었다. 열차는 이대로의 상태로 마지막 언덕을 지나칠 것이었다.

 

- 그러니까, 준수야.

 

겨우 소리내서 부른 순간이었던가. 열차가 터널을 빠져나오며 한순간에 객실 내부로 환한 빛이 쏟아졌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빛에 전영중은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다시 시야를 되찾았을 때 보인 것은 어딘가 괴로워 보이는 표정의 성준수였다. 전영중은 일시적으로 할 말을 잃고 한참이나 같은 얼굴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 전영중.

- 응.

-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좆같아서 참아 줄 수가 없다.

- 언제는 되게 참은 것처럼 얘기하네.

- 유언 남기고 싶어서 안달 났지?

 

성준수가 말을 멈췄다. 당장이라도 쏟아붓고 싶은 감정을 참아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전영중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가만 이 침묵이 깨지기를 기다려 줄 수밖에 없었다. 야, 너 그거 아냐. 한참의 정적 끝에 성준수가 꺼낸 이야기는 의외의 내용이었다.

 

- 눈이 녹았어.

 

너는 모르겠는데, 꼬리 칸 인간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창문만 쳐다봐. 예전에는 뭐 식량 걸고 도박도 하고 그랬는데, 한번 다 압수 당해서 좆될 뻔하고 할 일이 없거든. 나는 거기서 봤어. 창밖으로 검은색 모자가 보였어. 모자가 보였다고. 모자는 머리잖아. 그 사람들은 몇 년 전에 열차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었어. 마지막으로 뒤덮였을 머리가 보였다는 게, 무슨 뜻인지 네가 아냐?

전영중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물어 버렸다. 이내 조용히 총구를 거둔 성준수가 내던져 두었던 가방을 챙겨 들었다. 이딴 거 존나 불편하기만 해. 성준수는 정복을 벗어 던진 뒤 곱게 접혀 있던 제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었다. 전영중이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구석으로 걸어가 벽 한쪽을 매만져댔다. 걸려 있던 커튼을 잡아 뜯자 레일에서 찢겨 나온 천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자리에 녹슨 손잡이가 있었다.

성준수는 망설이지 않고 손잡이를 당겼다. 오래도록 열리지 않았던 탓인지 문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느릿하게 당겨졌다. 앞도, 뒤도 아닌 그런 곳에 문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 지금껏 이 공간에서만 살았던 전영중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살을 벨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들이닥쳤다. 온화하기만 했던 객실 안으로 서늘한 눈발이 날렸다. 열차가 철로 위를 달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속에서 성준수는 어느 순간보다도 건조한 말투로 물어 왔다.

- 선택해.

- …….

- 이제부터 어떻게 할래.

 

너도 갈래, 말래.

새하얗다. 설산보다 눈부신 모습이었다. 죄인은 순백했던가.

전영중은 귓바퀴를 스친 바람이 웅웅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잔상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문은 분명하게 열려 있었다.

도저히 제 눈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이런 건 결코 사랑이어서는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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