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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러니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던데. 성준수가 붕 뜬 몸으로 뒤집힌 시야를 가늠하며 자조했다. 과일 트럭과 부딪힌 탓에 석류며 사과며 온갖 동그란 것들이 바닥을 나뒹군다. 그걸 보며 심각하게 동글동글한 그 머리통을 떠올린 것도 중증이었다. 여기서 엎어져 버리면 내 몸은 어떻게 될까? 성준수는 하늘을 날며 생각했다. 어떤 교과서를 읽어도 교통사고가 난 직후 몸을 어떻게 가누어야 할지 나와 있지는 않겠으나. 성준수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 되긴, 그 새끼한테 못 가는 거지. 그게 원동력이 될 줄은 걔도 저도 몰랐을 게다. 몇 달 전의 우리라면.

 

 

 이 남자는 원중고교의 명물 성준수 군입니다. 새하얀 눈이 내리던 18년 전의 겨울,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난 낭만 그 자체의 소년! 남녀노소 한 번쯤 돌아볼 만한 얼굴로 태어난, 그래 마치… 그래요, 눈. 잘 빚은 눈 결정체처럼 조각조각 정성 들여 빚은 얼굴이라 날 때부터 이 조그마한 마을에서 화제가 되었었죠. 서로 자기를 닮아 아름답다며 싸우던 부부는 젊은 나이에 하나뿐인 아들을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정확히는 키웠었었었던…. 아, 저기 대청마루에 길게 뻗어 누운 남자가 바로 성준수 군의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소싯적 사람 좀 패고 다녔던 걸 홀로 아들 맡아 키우느라 모두 손 턴 이후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어 온다던데… 그건 정의로운 성준수 군의 생애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으므로 생략―

 

 

“다녀왔습니다.”

 

 

 성준수가 제 주변을 요란하게 떠다니는 텍스트 박스를 깡그리 구겨 던지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명철―성준수의 아버지―이 부채질하던 손으로 방 안을 가리키며 준수의 인사를 받았다. 들어와서 손 씻고 네 할머니가 사 온 석류 먹어라. 새까만 에나멜 로퍼를 가지런히 벗어 둔 준수가 매일 쓸고 닦아 깨끗한 마룻바닥을 밟았다. …네. 이곳은 태어나서 나고 자란 제집도 아닌 할머니 댁. 몇 년 전, 옛 버릇 못 버렸던 명철이 합의금을 물어줘야 하는 바람에 어머니와는 이혼하고 집까지 팔아버려 같은 동네인 할머니 댁에 얹혀살게 되었다. 명철이 가리킨 방향과 반대로 향해 계단을 오른 준수가 다락의 문을 열고 들어가 손을 휘휘 저었다. 이놈의 다락은 매일 청소해 주어도 매번 먼지가 풀풀 날렸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준수에게는 꽤 치명적인 방이었다. 얹혀사는 마당에 몸 누일 장소마저 불평해서는 안 되겠으나 아무리 그래도 개백수 성명철이 가장 안쪽 큰 방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짜증이 확 솟구치는 것이었다. 준수가 몸을 꽁꽁 싸매고 있던 교복을 하나둘 벗어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었다. 구겨진 부분을 문질러 펴고, 셔츠 소매에 묻은 샤프 자국은 물을 묻혀 살살 지워냈다. 그사이 방구석을 주파하는 거미를 잡아 창밖으로 던졌다. 단전부터 한숨이 끓어올랐다.

 

 

“성쭈이~, 우리 준수. 얼른 나와. 석류 식겠다!”

 

 

 다락문 밑에서 명철의 목소리가 멀거니 들렸다. 석류 식겠다는 건 무슨 말이야, 대체.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다시 셔츠와 함께 정갈하게 걸어둔 준수가 새까만 반소매 티셔츠로 갈아입은 후 다락을 빠져나왔다. 낡은 집의 계단 난간에서 살짝 튀어나온 가시가 준수의 손바닥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온종일 누적된 스트레스에 걸음을 멈춘 준수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지금에서야 말하건대, 성준수는 그 얼굴만큼 좋은 성격을 지니진 못했으며, 명철에게 부성애가 없는 만큼 효심이 쥐뿔도 없었다…. 그러니 막 꽃다운 청춘을 보내고 있어야 할 성준수의 단 하나뿐인 목표는. 하…, 씨발. 대학은 기필코 서울로 간다. 이 좆같은 동네를 벗어나 야경이 그렇게나 아름답다던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원중고교. 평균 연령이 50대인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10대가 많은 장소. 그 이유인즉슨 주변 동네에서 큰 도시로 진학하지 못한 꼴통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성준수야 뭐…, 그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 주는 가정사 탓에 원하던 고등학교에는 못 갔다―성준수는 이것을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성준수는 원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제정신을 지닌 학생, 그야말로 명물, 살아 움직이는 전설이 되었는데. 그게 좋은 일이냐고 한다면 단연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내저을 수 있을 만큼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첫 번째, 성준수는 교복을 입었다. 원중은 이곳에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마저 여기는 교복 없으니까 돈 굳었네, 라고 말할 정도로 교복이 무의미한 학교였다. 웬 야쿠자들이 입을 법한 휘황찬란한 두루마기 같은 것들로 시작하여 철자 하나씩 틀린 짜가 명품들까지 다양한 패션이 줄을 이었다. 불편한 옷을 굳이 고집하는 건 아니었으나 성준수가 그토록 새까만 교복에 하얀 셔츠, 마지막으로 빨간 넥타이를 고집한 건 그들에게 속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성준수는 원중 무리에 소속되고 싶지 않았다. 당연하잖아…, 이런 곳에 섞이는 걸 자랑거리로 여기는 새끼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양아치 녀석들 말고 더 있나. 교복은 일종의 선이었다. 니들과 나는 달라, 뭐 그런. 그렇게 성준수는 원중에서 ‘잘생기고 교복 입는 애’가 되었다. 성준수의 이름을 몰라도―솔직히 모를 수가 없다― 교복 입고 다니는 애, 하면 누구든지 성준수를 떠올렸다. 그 정도였다.

 두 번째, 이 지랄맞은 곳에서 솔플을 했다. 앞서 말했듯 성준수는 양아치 새끼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원중이 멀쩡한 놈 찾아보기 힘든 양아치 소굴이었으므로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성준수도 처음에는 친구 사귀기를 시도해 보지 않은 게 아니었으나, 귓속에 벌레를 쑤셔 넣는 듯한 저급함과 그들의 몸에 밴 담배와 매연 냄새에 학을 뗐다. 그놈의 바이크는 어디서 공구라도 하는 건가. 성준수는 매일 아침 교문 앞에 줄 세워진 바이크를 보며 벌점을 체크하는 데 신의 경지에 오를 지경이었다. 혼자 다니는 것이 심신의 건강상 훨씬 좋았다. 아무튼 이런 점을 높이 산 선생님들이 성준수에게 선도부장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웃긴 건 선도부장도 선도부원도 성준수뿐이라는 점이었다. 속하고 싶지도 않고 양아치들이랑 말도 섞기 싫어하는 성준수가 대머리 교무부장의 제안을 승낙하게 된 이유는 당연하게도 하나뿐이었다. 입시. 그렇게 성준수의 별명에는 그도 모르는 사이 ‘고독한 선도부장’이 추가되었다….

 

 세 번째, 주먹질 안 하고 공부했다. 성준수의 양아치 짓에 대한 혐오는 자연스럽게 아버지로부터 출발한다. 성명철은 어렸을 적부터 죽여주는 양아치였다. 지금이야 다 청산하고 집에 개백수처럼 붙어 있는다지만, 솔직히는 여전히 명철이 무얼 하며 벌어 먹고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집과 엄마를 잃고 할머니 댁의 다락에서 살게 된 것도 명철의 생산성 없는 짓거리들 때문이었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히 설명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성명철은 성준수의 반면교사인 셈이었다. 성준수는 아비처럼 크기 싫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건 이 학교로부터, 동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었으며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수시는 이미 학교 꼬락서니를 봐선 무리였으므로 정시. 성준수는 쓰레빠와 쓰레기가 날아다니는 교실 맨 앞자리에서 귀마개를 하고 모의고사를 푸는, 그야말로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정수였다.

 그런 성준수에게 최근 들어 가장 큰 고민이 있었는데. 준수가 이번 달 생활비를 가늠하며 얼마나 저축할 수 있는지 계산했다.

 

 

“그럼 준수야, 이대로만 하면 너가 원하는 인서울은 충분히 가능하니까 포기하지 말고 해보자!”

 

“네, 안녕히 계세요.”

 

 

 교무실 문을 닫고 나오니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1학년 때부터 진로 상담이나 진학 상담의 내용은 동일했다. 어차피 상담받는 사람은 성준수 하나이므로 조금 성의 있게 해도 되지 않나 싶겠으나 성준수 자체가 목표 의식이 뚜렷해서 달리 해줄 말도 없었다. 무조건 인서울 좋은 대학 들어가서 상경하기. 따라서 매 학기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는 상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금 부딪힌 문제는 학업과 살짝 먼, 현실의 문제였다.

 성준수는 성명철에게 모아둔 돈 같은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성준수의 상경은 오로지 성준수의 힘으로 일궈내야 했다. 등록금은 장학금 주는 대학으로 간다고 쳐도, 인맥 하나 없는 서울살이를 하려면 돈이…. 머릿속에서 숫자를 굴려 보던 준수가 가방끈을 꽉 쥐었다. 돈이 문제였다. 명철의 합의금 때부터 늘 이 집구석은 돈이,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아르바이트를 할 만한 동네도 아니었다. 최저 시급을 받을 수 있기나 하면 다행인, 지연으로만 돌아가는 시골 동네. 아르바이트도 아니라 심부름 정도의 개념이었다. 그렇다면 성준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준수의 신코에 자갈돌이 채였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공부에 방해되지 않는 것. 세상에 그런 게 어딨…. 문득 고개를 들어 보게 된 디비디방의 진열대에서 흘러나오는 화질 구린 삼류 영화가 준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입술을 붉게 칠한 여자와 교복 멀끔히 차려입은 남자가 나란히 앉아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그러니까 가르쳐 주고 있었다. 과외. 인물 구성을 보아 저 내용이 쓰레기 같은 포르노겠구나 싶었지만 그건 준수의 알 바가 아니었다. 과외는 예로부터 돈이 되는 일이 아니었던가. …하, 근데 씨발 이 촌 동네에서? 머릿속에 번뜩한 아이디어는 금세 힘을 잃어갔다. 원중에 다니는 다른 동네 사람들을 기대해 보기도 힘들었다. 그 꼴통 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애가 있다면 성준수가 가장 먼저 알았을 터였다. 내가 잘하는 게 공부가 아니라 다른 거였으면 뭐라도 돈이 좀 됐을까. 준수가 하천을 향해 돌멩이를 뻥 찼다. 잔잔한 물결을 파고든 돌멩이가 하천 아래로 푹 꺼졌다. 해결되나 싶었던 고민이 되돌아왔다.

 그래도 그날 밤, 성준수는 혹시 모르는 마음에 직접 전단을 만들었다. 씨바거,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된다고? 가정통신문 뒷면에 글자 몇 자 적어 내린 준수가 아래쪽엔 제 전화번호를 적고 문어발처럼 잘라냈다. 세 장 정도를 만들고 나서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어져 전단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성명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날이었다.

 

 

 성준수가 하도 조용히 지낸 탓에 소란스러울 일 없는 마당으로 배기음 소리 움푹 내며 바이크가 들어섰다. 마당 빨랫줄에 셔츠를 걸던 준수가 고개를 빼 요란한 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새빨간 몸체에 검은색 포인트가 있는 바이크. 어, 저거…. 성준수가 몇 번 본 것이었다. 몇 반이더라. 우리 학년 앞 반 남자애 거였던 것 같은데. 바이크에 꽂혔던 시선을 올려 핸들을 쥔 손, 더 위로 올라가 사방이 꽁꽁 막힌 헬멧을 바라보았다. 이 늦더위에 유광 재킷 차려입은 덩치가 꽤 컸다. 아, 쟤.

 

 

“요~ 준수.”

 

 

 단번에 헬멧을 벗어내고 살짝 눌어붙은 앞머리를 고갯짓으로 털어내며 방긋 웃는다. 2반 13번 전영중. 저와는 별달리 부딪힐 일 많이 없던 양아치 중 한 명이지만,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준수가 미간을 와락 좁혔다. 다시 말하건대 성준수는 전영중과 어떠한 인연도 없었다. 아주 가끔 바이크 탓에 벌점 체크하는 정도? 그니까 하교 시간이 살짝 지나 노을이 예쁘게 지는 이 시각에 집을 쳐들어와 ‘요~ 준수’라고 친근하게 부를 일이 없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소금을 쳐야 되나. 성준수는 성명철이 이 상황을 목격하기 전에 저 불청객을 쫓아내고 싶었다. 준수가 답 없이 험악한 얼굴을 만드는 사이 영중은 바이크에서 사뿐히 내려왔다.

 

 

“여기가 준수네구나. 종종 밤에 지나다녔는데 몰랐네.”

 

 

이런 씨발…, 가끔 밤에 들렸던 배기음 소리가 네 녀석 거였구나.

 

 

“전화번호만 적어두면 어떡해? 연락도 안 보면서. 준수네 알아내기 힘들었잖아.”

 

“…뭐?”

 

 

 영중의 말에 준수가 차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며 제 핸드폰이 어디 있는지를 가늠했다. 아마도 빨래 때문에 방에서 가져오지 않은 듯싶은데, 그새 연락을…. 아니, 진짜 뭐라고? 어느새 준수에게 가까이 다가선 영중이 여전히 빙글대는 미소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건 일종의 청천벽력과도 같아서, 성준수는 곧장 제 귀를 의심했다. 야, 야, 씹… 다시 말해 봐. 뭐가 어쨌다고?

 

 

“과외 해준다는 거 아니었어? 나 그 전단지 보고 왔는데. 뭐라더라, 모의고사 올 일 등급이 해주는 과외 받아보세요? 웃기지, 펜 한 번 쥐어보지도 않았을 애들만 모인 우리 학교 앞에 그런 게 붙어 있다는 게.”

 

“…야. 그거 거짓말이니까 그냥 가라.”

 

 

 성준수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아냈다. 아니 니 말대로 존나 웃긴 일인데 그걸 보고 진짜 집까지 찾아오면 어떡해? 성준수는 전단을 만든 다음 날, 밑져야 본전이라는―돌이켜보면 정신 나간― 마인드로 학교 앞, 집 근처 벽, 버스 정류장 세 곳에 붙여두었다. 끽해야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있는 집에서나 연락 올 것을 기대했었다. 근데 지금 제 앞에 선 이는… 어리긴 개뿔, 성준수가 그토록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준수의 패닉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영중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입매를 굳혔다.

 

 

“왜? 같은 학년은 안 받아줘?”

 

“같은 학년이고 나발이고 공부할 생각도 없는 애한테 뭘 가르치냐? 괴롭히러 온 거면 사람 잘못 골랐다. 꺼져라.”

 

“나 너 괴롭히러 온 거 아닌데. 내가 지금 너 괴롭혀?”

 

“아니, 영중아… 하.”

 

 

 영중이 다시 눈매를 휘었다. 눈만 웃는 표정이 섬뜩했으나 성준수의 깡으로는 그 서늘함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너 내 이름 아네? 영중의 말에 준수는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하니. 가라고 그냥.

 

 

“근데 준수야.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그러면 어떡해.”

 

“……바이크 타고 집에 쳐들어온 주제에.”

 

“그게 싫었던 거면 다시 밖에 내놓고 오고.”

 

 

 도저히 말이 안 통할 듯싶었다. 준수가 입을 벙긋대다가 그냥 다물어 버리자 영중이 정말로 바이크를 질질 끌어 대문 밖에 세워두고 돌아왔다. 아 진짜 이거 뭐 하는 새끼지…. 영중이 빨랫감을 쥐고 있던 준수의 손을 겹쳐 잡았다. 그 악력이 세서 손을 빼지도 못하니 부탁한다는 모양새로 꼬옥 겹쳐왔다. 준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손과 그 얼굴을 번갈아 보자 영중이 기어코 쐐기를 박았다. 나 과외받으러 왔어. 공부할 마음도 있어. 그저께 딱 맘먹은 참이거든. 목소리가 의지로 똘똘 뭉쳐 단단했다. 그래도 이건… 좀. 전영중과 이렇게라도 얽히는 건 성준수의 신념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원중과도 엮이고 싶지 않았고, 양아치랑은 더더욱 아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양아치는 성명철 하나로도 충분했다. 역시 학교 앞에는 붙이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이 촌구석에서 과외라는 것을 아이디어랍시고 여기면 안 됐던 거다. 준수가 거절하기 위해 입을 벌리자 영중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손까지 거두어가고 꽤 비장한 몸짓으로….

 

 

“영어 한 과목, 주에 15 줄게. 이 정도면 할 만해?”

 

 

 어? 갑자기 전영중의 얼굴 옆으로 막 꽃이 피어났다. 손이 잡혀 있어 텍스트 박스를 구겨 던졌던 것처럼은 못하겠으나 방금 들은 말을 곱씹어보며 저 정도 꽃은 용서해 줘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주급으로 15면, 한 달 꽉 채웠을 때 60까지 가는 거잖아. 성준수가 당혹감에 눈을 깜박이자 전영중이 이번에는 정말로 훤칠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을 재촉했다. 응? 준수가 손목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보고, 명철이 올 시간까지 가늠한 이후 영중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과외라는 건 존나 끝내주는 아이디어였다! 인생은 기니까 양아치 한 명 정도는 더 들여도 괜찮겠지. 전영중을 가르치는 게 원중이랑 엮이는 건 아니잖아? 과외 선생이랑 학생이면 뭐 대충 비즈니스 관계고…. 빠르게 합리화를 마친 준수가 다시 가정통신문 뒷면에다가 몇 가지 문제를 적어 내렸다. 이거 풀어 봐. 이게 뭔데. 테스트. 준수야… 우리 진도가 너무 빠르다. 난 더 빨리할 수도 있어. 성준수는 이미 머릿속으로 일 년 치 계획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와, 일 년 치 등록금 뚝딱이잖아. 준수가 빌려준 샤프로 이면지 위에 글씨를 끄적이는 영중을 내려다보며 준수가 전례 없는 온화한 표정을 지어냈다.

 전영중이 돌아간 그날 밤, 성준수의 핸드폰에 은행 알림이 울렸다. 매달 명철이 보내는 생활비가 아니면 울릴 일 없던 알림에 준수가 곧장 잠금을 풀어 알림을 확인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육십만? 곧이어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준수 도망가지 말라고 한 달 선결제^^

나 영중이야. 번호 저장해.

다음 주에 봐~

 

 이런 씨발. 전영중은 성준수 인생에 찾아온 황금 돼지가 따로 없었다.

 

 

 영중이 방긋방긋 웃으며 파르페를 떠먹었다. 나 혼자 와도 됐었는데. 응? 무슨 소리야? 내가 같이 가고 싶었던 거라니까, 준수야. 그 짧은 대화 이후 오가는 말은 없었다. 애초에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성준수는 양아치와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었다. 다행인 점은 전영중에게서 거슬리는 부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성준수가 제 앞에 놓인 초코 라테를 한 모금 머금었다. 전영중이 마음대로 주문한 음료였으나 꽤 괜찮았다.

 

 

“단 것도 나쁘지 않지? 맨날 커피만 마시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

 

“나 커피 안 마셔.”

 

“그래? 공부쟁이들은 입에 커피 달고 살 줄 알았는데 의외네.”

 

“헛소리 말고 오늘 산 거나 좀 훑어봐.”

 

 

 영중이 어깨를 으쓱이곤 문제집을 꺼내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이 황금 같은 주말에 배차 간격 1시간 20분인 버스 갈아타 가며 시내까지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과외 교재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전영중이 집으로 쳐들어온 날, 곧장 치렀던 테스트는 당연히 엉망진창이었다. 영중은 3개 맞힌 테스트지를 보며 나쁘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어쨌든 성준수가 갖고 있는 문제집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일정을 쫄래쫄래 따라온 영중이 서점에서 볼 일을 마친 준수를 이끌고 아기자기한 카페로 들어와 버린 게 지금이었다. 손을 뿌리친 후 곧장 집에 돌아가도 됐을 터였지만 준수 또한 오랜만에 집 근처를 벗어난 것이었으므로 영중에게 조금 어울려 주기로 했다. 기초 문법을 들고 페이지를 넘기던 영중이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덮었다. 뭔 말인지 모르겠어어…, 준수가 알려줘야겠는데? 영중의 앓는 소리에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돈 받고 과외 하지. 그 예사로운 말투에 영중이 또 눈을 접어 웃었다. 참… 잘 웃는다. 준수가 그제야 살짝 껄끄러워져 헛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전영중은 성준수가 싫어하는 부류였음에도 곧잘 성준수에게 어울려 왔다. 이건 성준수에게 찾아온 황금 돼지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준수가 신경질적으로 음료를 들이켜자 영중이 준수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준수야, 사레들려. 그래, 이런 점이. 전영중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파르페를 떠먹었다. 한참을 우물대던 입이 또 별난 말을 뱉어냈다.

 

 

“준수야, 나랑 과외 할 때는 나한테만 집중해 줘야 돼, 알겠지.”

 

“어? 어….”

 

 

 갑자기 뭔. 안 그래도 전영중이 성준수를 찾아오며 전단 같지도 않은 전단을 다 찢어 훼손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투잡을 뛸 수는 없었다. 그 학교에서 갑자기 공부하고 싶어 하는 이상한 놈은 너 하나밖에 없을 거다. 준수의 뼈 있는 말에도 기분이 좋은 듯 영중이 밝게 웃었다. 얜 진짜… 뭐 하는 놈이지. 남은 파르페를 털어 넣은 영중이 준수의 옆자리로 옮겨와 앉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였음에도 여전히 전영중에게선 성준수가 싫어하던 냄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 할 거 많이 없지? 여기 쫌 있다가, 이 주변에 내가 아는 오락실 있는데 거기 들렀다가 가자. 아, 나 바이크 부품 찾을 것도 있는데 같이 갈래? 그리고 또…. 준수가 뒤로 바짝 물렸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음, 좀, 뭔가. 튀어나올 뻔한 웃음을 참아낸 준수가 영중을 보던 눈을 돌려 테이블 위로 고정했다. 기분이…. 종종 동네를 벗어나는 환기에 전영중이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영중의 수줍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걸렸다.

 

 

“근데 우리 이러니까… 꼭 데이트하는 것 같다. 그치.”

 

 

하…, 썅. 방금 했던 생각 취소다.

 

 

 전영중은 정말 웃기는 놈이었다. 공부의 근간은 옷차림과 행색이라며 교복을 입고 다닐 것을 지시했더니 정말로 다음날부터 정갈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왔다. 바지는 왜 사복이냐고 묻자 키가 훌쩍 커서 교복 바지가 도저히 들어가질 않는단다. 덕분에 원중에서 교복 입는 별난 놈이 둘이나 됐다.

 

 

“요~ 준수.”

 

“야, 학교에서는 말 걸지 말라고.”

 

 

 그럼 보고 싶은데 참으라고? 당연한 물음에 준수가 고개를 끄덕여줬다. 성준수와 전영중은 과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함께 규칙을 정했다. 대부분 숙제 무조건 해오기, 지각하지 않기 같은 기본적인 것이었으나 성준수가 들이민 특별한 조항이 있었다. 아는 척 안 하기. 그건 성준수의 마지막 신념이었다. 전영중과의 기묘한 관계를 성명철한테 들켜도, 원중 학생들한테 들켜도, 심지어 선생님들에게 들켜도 문제였다. 물론 전영중의 반발이 거셌지만 성준수의 고집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없었었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생각보다 더 막 나가는 놈이었다….

 

 

“애초에 보고 싶다는 것부터가 이상하잖아. 니 친구들이나 보러 가.”

 

“걔네보다 너가 더 재밌어.”

 

“사람을 장난감으로 알아.”

 

“진심인데….”

 

 

 결국 준수의 담임이 그를 은밀히 상담실로 불러 혹시 괴롭힘을 당하느냐고 물었을 때가 되어서야 영중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준수 너 정말 선도부장이긴 하구나…. 원중의 하나뿐인 선도부장과 새빨간 바이크 타고 다니는 양아치가 어울리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전영중이 기어코 알게 된 것이었다. 전영중은 한참 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못마땅해하다가 마지못해 한발 물러났다. 그럼 연락 잘 받아. 어차피 이틀에 한 번꼴로 과외 때문에 얼굴을 보기 싫어도 봐야 했는데 왜 그렇게 아는 척하지 못해 안달인가 싶었다. 학교에서는 쌩까고 메시지랑 전화로만 하하 호호하는 게 더 웃긴 거 아닌가? 하지만 성준수의 단순한 사고는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준수의 방은 애초부터 건장한 남자가 생활할 만한 곳이 아니었기에 영중까지 들어서자 숨 쉴 틈도 없이 좁아졌다. 영중은 나름 만족하는 듯했으나 준수는 아니었다. 마주 앉을 공간도 없어 나란히 앉아 더운 숨을 공유해야 했다. 만약 지금이 한여름이었다면 성준수는 전영중의 입을 틀어막고도 남았을 거다. 원체 친구 없이 홀로 지내던 성준수가 남과 이렇게까지 가까워진다는 건… 정말이지 성준수의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다음에는 저번에 갔던 카페에서 어때?”

 

“나도 참고 하니까 그냥 너도 참고 해.”

 

 

 못 참겠다는 게 아니라. 영중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작은 창문으로는 역부족이었던 듯 상기된 두 뺨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그래서 성준수가 왜 과외 장소로 굳이 제 방을 선택했는지 묻는다면… 사실상 할 곳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성준수는 기필코 성명철에게 이 일련의 상황을 비밀로 하고 싶었으므로 집에다가 대놓고 전영중을 소개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전영중의 집은 이 동네가 아니었기에 이동 수단이 없는 성준수가 오갈 수 없었다. 영중은 기회를 틈타 매일 준수를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그걸 승낙할 리 없었다. 집도 다 제외하면 시내? 차라리 놀러 가자는 게 더 일리 있고. 원중 주변이나 이 동네는 어느 가게든지 무조건 아는 사람을 마주쳐야 했기에 기각됐다. 그렇게 채택된 장소가 성준수의 다락이었다. 전영중은 양아치 중에서도 드물게 깔끔떠는 놈인 것 같았기에 성준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제 방을 허락했다. 전영중이야 뭐…. 뭐가 그리 궁금한지 과외 첫날 특유의 방긋대는 얼굴로 성준수의 세간 살림을 다 뒤져 보려 하여 쫓겨날 뻔했다.

 

 

“그럼 또 가자.”

 

“뭘?”

 

“시내에. 공부 말고 데이트하러.”

 

“…숙제나 다 해 와. 여기까지.”

 

 

 성준수 진짜 피도 눈물도 없다…. 준수가 오늘 나간 진도만큼의 페이지를 접어주자 영중이 경악했다. 다 해 올 거면서. 궁극적으로 전영중이 정말 웃기는 놈인 이유가 뭐냐면, 성준수가 싫어하는 요소를 모두 갖춰놓고 성실하다는 점이었다. 과외를 시작한 지 몇 주가 되었는데도 숙제나 지각과 관련한 규칙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 범생이 가방―준수의 것을 물어보더니 같은 거로 사 왔다―에 문제집을 챙겨 넣은 영중이 다락문을 열어 아래층을 살폈다. 아버님 없으신 것 같은데? 아버님은 뭔 개뿔이 아버님…. 준수가 영중의 어깨 너머로 아래를 살피자 영중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혹시 몰라 작게 속삭인 준수에 영중이 더 크게 웃음소리를 냈다.

 

 

“준수야. 우리 이러니까 꼭….”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비밀연애 하는 것 같다.”

 

 

 성준수가 발로 전영중을 밀어냈다. 얼떨결에 계단을 내려간 영중이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들어 준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연락할게. 내일 봐! 속삭이는 음성에 준수가 대꾸 없이 다락문을 닫았다. …진짜 웃기는 놈이야. 곧장 핸드폰 화면이 반짝거렸다.

숙제 다 해오면 소원 들어줘. ♡

 열어둔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배기음을 들으며 준수는 안 하려던 답장을 보냈다. 너 하는 거 봐서. 이제야 조금, 방의 열기가 식어가기 시작했다.

 

 

 9월 시험이 다가오자 준수는 조금 더 바빠졌고, 영중은 여전히 말 잘 듣는 과외생으로 남았다. 그래서 성준수는 그제야 조금 궁금해졌다. 성적을 신경 쓰느라 과외받고자 하는 건 아닌 듯한데. 그 많고 많은 과목 중에서도 콕 집어 영어를 선택한 건 또 왜일까. 다락방에 어깨를 딱 붙이고 앉아 영중이 사 온 하드 바를 깨물어 먹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덥고 차가운 입김이 번져 기분이 이상했다.

 

 

“근데 넌 왜 갑자기 공부하려고 했냐?”

 

“음…. 준수야, 진짜 빨리도 물어보네?”

 

“…뭐, 내가 궁금해했어야 돼?”

 

 

 나 섭섭해.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영중의 표정은 덤덤했다. 영중이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 가득 넣고 차가운 숨을 훅훅 뱉었다. 사실 영중의 말대로 지금에서야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했다. 차라리 전영중이 바이크를 끌고 집에 쳐들어온 날, 그날 물었어야 했던 거다. 한낱 고등학생이 달에 육십이나 주고서 동갑내기 과외 선생을 구한 이유가 무엇인지. 하지만…. 지금에서라도 궁금해진 건, 안 돼? 준수의 말에 영중이 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보기 드문 당황한 낌새에 준수가 작게 웃었다. 여전히 횡설수설하며 영중이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어, 근데, 실은, 별건 아니고. 준수 너가 들으면 고작 그런 이유냐고 뭐라 할 수도 있어.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중이 몇 주 전의 일을 더듬듯 다 먹은 하드 바의 막대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 눈에 그늘이 져 있었다.

 

 

“우리, 바이크 타고 다니는 무리가 있어. 준수 너도 알 텐데.”

 

“아… 잘 알지.”

 

 

 성준수가 매일 아침 벌점을 체크하는 그 인원들인가보다 싶었다. 네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거기 짱이 있는데… 내가 그 형을 잘 따랐거든.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성준수는 먹던 아이스크림을 토해낼 뻔했다. 역겹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저 목소리가… 저 눈이, 전영중의 참 많은 감정을 담고 있어서.

 

 

“그 형이 얼마 전에 갑자기 다 정리하고 떠났어.”

 

“…어디로?”

 

“정확히는 몰라. 영어를 쓰는 나라래. 다 같이 매일 밤 바이크나 몰면서 자유를 찾던 사람이 정말로 혼자서만 자유를,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떠나버린 거야.”

 

“그래서 너도, 그 형이라는 사람 따라 하고 싶어서 시작한 거야?”

 

 

 음. 영중이 무릎을 끌어안았다. 영중도 사실 제가 무슨 이유로 영어 공부를 하고자 했는지는 잘 몰랐다. 형을 따라갈 것도 아니었고, 저는 여기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텐데. 어울리지도 않게 무슨 영어를….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형을 만나러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전영중은 그날을 바라며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영중이 어깨를 으쓱이며 또 웃었다. 따라 하고 싶었는지, 따라가고 싶던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 어때, 진짜 별거 아니고 이상하지. 이제는 습관이 된 웃음에 준수가 처음으로 영중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영중이 이마를 붙잡고 뒤로 넘어갔다. 준수가 영중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얘를 내려다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게 전영중을 봐서인지, 저의 과외가 고작 수단이었음을 알게 돼서인지 구별이 되질 않았다. 수단이면 뭐. 나야말로 전영중을 돈 벌 수단으로 봤던 게 아닌가? 애초에 전영중한테 뭐라도… 바라고 있던 건가? 영중이 준수를 마주 올려다보며 그 복잡한 얼굴을 감상했다.

 

 

“왜, 준수야. 네가 죽어라 열심히 하는 공부가 다른 사람한테는 고작 이런 의미라서 짜증 나?”

 

“…뭐래.”

 

 

 그래도 성준수는 지금 전영중에게 어떤 말이 가장 필요한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죽어라 열심히 하는 공부. 고작 공부. 고작 문제 풀이. 야, 영중아. 네가 나를 뭐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순간 몰려드는 갑갑함에 준수가 교복 셔츠 단추를 두어 개 끌렀다. 영중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너는 목표가 해외라도 되지. 나는 고작 서울이야.”

 

“…서울?”

 

“나는 이 거지 같은 동네 떠나서 상경하는 게 목표다, 영중아. 학교 공부라는 게 다 그래. 별것도 아닌 이유야. 나보단… 니가 더 낫네.”

 

 

 여길 떠나고 싶다고? 예상 밖의 반응에 준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영중이 누워있던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영중을 내려다보던 준수와 거리가 가까워졌다. 아, 또 뭔가가 울컥…. 성준수가 입 안쪽 여린 살을 씹어대며 전영중을 겨우 똑바로 마주했다. 그럼 넌… 여길 떠나서 서울로 가고 싶은 이유가 뭔데? 성준수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서울로 가고 싶은 이유, 라. 다 하지 못할 이야기가 길었다. 성명철이나, 이 동네가 지긋지긋해진 이유나. 엄마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시로 도망가 버린 것도. 성준수는 느리게 굴러가는 머리로 전영중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떠올려냈다. 그러니까, 서울은.

 

 

“야경이 그렇게 예쁘다더라.”

 

“…응?”

 

“왜, 너 그런 거 좋아하는 거 아니야? 맨날 밤에 존나 시끄럽게 구는 것도 그래서인 줄 알았는데.”

 

 

 아니…, 너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의외라. 전영중은 정말 놀랐는지 입까지 벌린 채 몸을 굳혔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밤의 거리를 좋아하는 걸까. 성준수는 사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이상하게 전영중을 한층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작 제대로 말한 건 없으면서도 속내를 뒤집어 깐 기분이. 준수는 잠시 사람들의 활력으로 나부끼는 거리를 떠올렸다가, 간이 책상 밑에 숨겨둔 문제집을 꺼냈다. 자, 그럼 시작하자. 오늘은 떠드느라 늦은 만큼 더 하고 가라. 으응. 영중이 어기적어기적 샤프를 쥐었다. 우리는 둘 다 어디론가 가고 싶은 사람이었구나. 가벼워져야 할 고백들이 어쩐지 무겁게만 느껴졌다.

 

 

 바뀐 건 없었다. 여전히 전영중은 성준수를 보고 싶어 했으며, 과외가 없는 날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전화를 걸었다. 그 형이란 사람은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냐? 물었을 땐 질투하냐는 되물음이 돌아와 준수는 진심으로 역정을 냈다. 영중은 한참 뒤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 형이 아니야.

전영중은 성준수가 알파벳을 읊조릴 때마다 그 입술을 뚫어지게 보는 습관이 있었다. 성준수가 그걸 알아챈 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눈치챈 순간부터 입 모양을 신경 쓰느라 죽는 줄 알았다. 그니까… 지금도 그렇다는 소리였다. 준수가 영중의 단어 시험을 채점할 동안 영중은 책상 위에 엎드려 그런 준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준수야. 준수가 한껏 늘어난 동그라미 개수에 영중을 신경 쓰던 것도 잊고 놀란 눈을 떴다. 선도부 씨? 첫날 테스트했던 것보다 열 배는 더 많이 맞힌 결과라 준수는 전례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 맛에 자식 키우나 싶기도 하고. 준수 선생님. 영중이 준수에게로 살짝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 준수가 놀란 어깨를 흠칫 떨며 상체를 뒤로 살짝 물렸다. 그래봤자 곧장 벽이 닿아 멀리 도망갈 수도 없었다.

 

 

“있잖아, 라이크랑 러브의 차이는 뭘까?”

 

 

 전영중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물은 건 그야말로 별거 아닌 헛소리였다. 뭐긴 뭐야, 좋아한다랑 사랑한다의 차이지. 준수가 딱딱한 답을 뱉어내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영중의 미간이 곱게 좁혀들었다. 흐음… 그러면 준수는 뭐가 더 좋아? 바라는 대답이 있는 눈치였다.

 

 

“…난 둘 다 싫어.”

 

 

 라이크든 러브든, 둘 다 준수가 가져본 적 없던 단어였다. 사랑받으며 자랄 줄 알았던 것도 다 착각이었고 어쩌면 그와는 거리가 멀게 방치되어 자라난 사람이었다. 성준수는 보통 잘 모르는 것이나 감정에 불쾌감을 느꼈으므로 이 두 단어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던 모양인지 영중이 흐물흐물해져서는 다시 책상 위로 엎드렸다. 그 틈을 타 준수도 영중의 시험지를 내려두었다. 상단에 그레이트를 크게 적어준, 영중의 성장 지표였다. 영중은 시험 결과를 쳐다보지도 않고 준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나 이번 시험 잘 보면, 그때 다시 알려줘. 소원권 여기에 쓸래.”

 

 

 소원권? 기억 저편에 묻어둔 것을 끄집어냈다. 숙제를 다 해오면 소원을 들어달라고 말하는 건 영중의 입버릇 같은 것이었다. 야, 그거 다 합하면 너 소원권이 열 개가 넘어. 딴지를 걸자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잠시 답을 유예하던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못 해줄 것도 아니긴 했다. 원래 보상이 있어야 동기 부여가 더 잘 되기도 하고. 그래봤자 대답이 바뀔 것 같진 않았다. 라이크랑 러브…. 그럼 전영중 너는? 준수의 물음에 영중이 금세 답을 내왔다.

 

 

“좋아해. …가 더 좋은 것 같아.”

 

“그러냐.”

 

 

 영중의 귀 끝이 발갰다. 라이크구나. 준수가 회화책을 꺼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건 보다 가볍고,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챕터의 도입을 여는 페이지에 가득 적힌 영어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주던 준수가 잠시 입술을 말아 넣었다. …야, 날 보지 말고 책을 봐. 아니 정말, 뱃속이 간지러웠다.

 

 

 팔을 보호대로 고정한 전영중이 교복도 없이 바이크 뒷자리에서 내렸다. 헬멧을 쓰고 있어도 이제는 전영중을 알아볼 수 있어서, 성준수의 얼굴이 단숨에 와락 구겨졌다. 헬멧을 건네며 태워준 남자의 어깨를 한 번 툭 친 영중이 교정을 걸어들어왔다. 상처가 한가득한 얼굴. 광대 쪽의 푸른 멍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개새끼. 영중이 지나갈 때쯤 준수가 벌점 명단에 코를 박았다. 원래도 말을 걸지 않기로 약속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더 마주치기 싫었다. 아, 그래. 이 새끼는 애초부터 그런 부류였지. 잠시 기대한 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지옥 같던 시험 기간이 끝난 후, 성준수는 거짓말같이 전영중에게 세 번이나 빠꾸를 먹었다. 혼자뿐인 다락에서 간이 책상을 펴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웃긴 일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 이곳에서 혼자 지내왔음에도 최근 몇 주, 고작 1개월 조금 넘게 두 사람이 부대꼈다고 방 안이 휑했다. 매번 더운 숨을 쉬었던 공간이 차가웠다. 성준수는 전영중을 기다리는 동안 걔를 만나면 방이 더웠던 건 다 니 탓이었다며 쏘아붙이리라 다짐했었다.

야.

야. 너 안 와?

시험 끝났다고 막 나가냐?

 매번 일 분도 안 돼서 답장했던 전영중이 하루가 지나도록 답장이 없자 성준수도 어느 정도는 마음을 비웠다. 화를 가라앉혔다는 게 아니라 전영중을 기다리는 걸 그만뒀다는 의미였다. 준수는 과외 때문에 조절했던 제 페이스를 다시 돌려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꾸만 핸드폰 화면이 번쩍거리는 게 신경 쓰여서 아예 가방 안에 핸드폰을 처박아두기까지 했다. 그러자 라이크니 러브니 물었던 그날이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남 같은 건 없는 셈 치고 잘살아왔었는데. 갑자기 제 머리가 고장 난 것만 같았다. 근데 정말, 왜 얼굴 한 번을 안 비추냐고. 니는 소원이 장난이냐? 역시 더 좋은 건 없었다. 둘 다 진짜 싫어.

 그랬는데 반쯤 다 쥐어터진 얼굴로 뻔뻔히 등장하시니 성준수 입장에서는 얼이 터지는 것이었다. 양아치들이 목소리만 커서는 전영중이 말도 없이 과외를 빠진 그날 뭘 했는지를 대차게 나불거렸다. 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주먹질이었다. …그럼 그렇지. 옛말에 바이크 타고 다니는 놈은 상종도 안 하는 거랬는데―성준수 가라사대다― 자기가 너무 많이 봐줬구나 싶었다. 아니면 답지 않게 깔끔떨었던 놈 탓에 착각했을지도. 오늘도 또 모인대? 매번 바이크를 몰고 와 기억하는 같은 반 남자애의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준수가 신경질적으로 교과서를 꺼냈다. 책상 서랍에 턱턱 걸리는 교과서마저 짜증이 유발했다. 어, 오늘이 진짜래. 다른 목소리가 답을 전했다. 마음을 비웠는데도 어쩔 수 없이 기분이 나빴다. 그럼 오늘도 과외는 패스겠지. 준수가 오후 일과를 머릿속에서 조정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약속했던 시간 삼십 분 전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준수 미안... 핸드폰이 맛이 가서 다른 애 폰으로 드디어 보낸다.

나 영중이야.

혹시 연락 기다렸어?

말없이 못 간 거 미안해. ㅜㅜ

오늘도 못 갈 것 같아서 연락했어. 다음엔 진짜로 갈게!

숙제도 해갈게!

 문자는 그렇게 끝났다. 오늘 교실에서 양아치 새끼들이 떠들어댔던 모임이니 뭐니 하는 거길 간 거겠지. 제 공부를 위해 폈던 간이 책상 위의 핸드폰이 더는 번쩍거리지 않았다. 하…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진짜. 성준수가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더 우스워지기 전에 관두고 싶어졌다. 영중의 번호와 오늘 온 문자의 번호 중 고민하던 준수가 영중과의 문자 내역으로 들어가 자판을 눌렀다. 그딴 식으로 할 거면 그만두자, 그냥. 언제 확인하든지는 상관없었다. 다시 돌아간 것이다. 남은 건 통장에 찍힌 숫자뿐이었다.

 

 

 성준수는 나름 건설적인 삶을 보냈다. 만족스러운 모의고사 성적표도 받았고, 지필 고사에도 매진할 수 있었다. 전영중이 없는 것도 나쁘지 않네.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하고자 했다. 성명철을 비롯한 양아치들과 학을 떼고 사는 게 목표 아니었던가. 원하는 대로 관계 청산을 마쳤음에도 성준수는… 자꾸만, 불가항력처럼 라이크와 러브를 고민했다.

 처음에는 용돈벌이가 끊겨서 그럴 거라고 여겼다. 그야 성준수가 과외를 시작한 이유도 돈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똑똑한 머리가 자꾸만 그 이상의 의문을 제기하는 탓에 성준수는 더욱 전영중 생각에 매진해야만 했다. 정말 전영중은 단순한 양아치 중 한 명이었나. 바이크를 좀 몰았지만 전영중은 제 말에 교복도 잘 입고 다녔고, 크게 선도부―그래봤자 성준수 하나뿐인―와 부딪힌 적도 없었다. 불쾌한 담배 냄새도 매연 냄새도 전영중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쁜 애는 아니었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다음날부터 전영중이 다시 교복을 잘 차려입고 등교하며 쐐기를 박았다. 넌 대체 뭐냐, 영중아.

 그 이유가 좀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공부를 꽤 열심히 따라오기도 했었다. 이것까지 떠올린 이상 성준수는 전영중한테서 ‘그 형’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까지도 헤아려야 했다. 성준수의 사고가 자꾸만 제어 없이 흘러갔다. 저를 그냥 수단으로 여긴 것 같아 짜증이 났기는… 개뿔. 한동안 전영중을 볼 수 없던 이유가, 게네가 한다던 모임이란 게, 그 형이란 작자와 관련이 있지는 않았을까 상상해 보니 더욱 좆같았다. 매번 저에게 보고 싶다며 들러붙던 전영중이 그 형을 보러 자기를 보러 안 왔다는 게. 보러 안 왔다는 게? 마구잡이로 흘러가던 사고가 거기까지 미치자 준수가 입을 꽉 틀어막았다. 이 무슨… 사춘기 여중생도 안 할 법한 생각인가. 전영중과의 짧다면 짧은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바이크를 타고 나타났던 전영중과 카페에서 파르페를 떠먹던 전영중. 종이 위를 꼬부랑 지나다녔던 그 글씨체도. 끝내는 영어 문장을 읽어줄 때마다 입술에 꽂혔던 시선까지 생생하게 떠올리고 말았다. 아, 진짜 씨발…. 기어코 홀려버리고 만 거구나. 성준수는 제 안에서 거세게 휘몰아치던 감정을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치밀었던 짜증과 분노가 다… 그래서였다니. 당장이라도 그 동그란 머리통을 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다.

 때마침 열어둔 창문으로 배기음 소리가 들렸다. 그게 전영중의 바이크 소리와는 달랐지만, 성준수는 홀린 듯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못 할 것 같아. 더 늦어지면 정말 후회할지도 모르지.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 1시간 동안 끙끙댔던 집념처럼 성준수는 매달리고 있었다. 전영중에게. 어느 번호로 연락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거짓말처럼 전화가 울렸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게 나타난 글자가 전영중을 조형하고 있어서, 성준수는 전화벨이 두 번도 채 울리기도 전에 초록색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배기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저것이 아니라, 걔의 것이 듣고 싶었다. 준수? 바깥인 듯 전화 너머로 바람 소리가 쌩쌩 들렸다. 무릎을 모아 앉아 핸드폰을 꼭 쥐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그제야 성준수는 제가 전영중을 그리워했음을 깨달았다.

 

 

- 왜 이렇게 빨리 받지? 평소답지 않게. 준수 진짜 내 연락 기다렸어?

 

“…….”

 

- 농담이야. 농담. 선생님 반응이 너무 딱딱하네~ …그게 사실, 전화할까 말까 고민 많이 했어. 오늘에서야 다시 내 폰을 쓸 수 있게 돼서 밀린 연락 확인했거든. 근데 처음 본 문자가… 그거라서.

 

 

 전영중에게 마지막으로 보냈던 문자를 떠올린 준수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홧김에 보냈던 것을 영중이 이제야 확인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준수가 답이 없자 영중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 내가 뭘 잘못했나 싶기도 하고. 물론 말없이 못 간 게 잘못인 건 아는데. …맞아, 내가 잘못했어. 난 근데 그만두고 싶지 않아. 과외도, …준수 너도. 다시 하자. 응? 이제 진짜 잘 나갈게. 나 숙제도 잘해갔잖아. 지각도 안 하고….

 

 

 너가 그랬잖아, 소원권 열 개는 있을 거라고. 그거 하나 지금 쓰면 안 돼? 그 애절한 어투에 성준수가 입술을 달싹댔다. 전영중이 제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줄곧 머리를 맴돈 말이 있었다. 자아를 가진 것처럼 자꾸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싶어 하는 그 말이. 전영중의 마음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으나 전영중은 계속해서 성준수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여전히 중얼대는 전영중의 말허리를 끊었다. 영중아. 저편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어.”

 

 

 성준수는 제가 남에게 이렇게까지 돌진할 수 있는 성격이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모두 전영중 때문이었다.

 

 

 성준수는 이제 전영중의 바이크 소리를 안다. 그토록 싫어하던 소리와 행색이었음에도 준수는 배기음이 들려오자마자 조심스럽게 밖으로 향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집 밖을 나서는 건 처음이었다. 할머니도 성명철도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 온 세상이 캄캄하고 오직 밝은 건 하늘에 높게 뜬 별뿐일 시간에. 대문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하자마자 성준수는 여태껏 지녀오던 신념과 자존심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요, 준수. 전영중이 자연스럽게 헬멧을 건넸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서 군말 없이 헬멧을 받아 썼다. 바이크 뒷좌석에 앉는 게 어색했다. 준수의 팔을 잡아당겨 제 허리를 감게 한 영중이 익숙한 몸짓으로 바이크를 몰기 시작했다. 뿌리치기를 포기하고 그 등에 몸을 기댔다. 저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전영중의 심장 소리가 나란히 들렸다.

 

 

“…괜찮아?”

 

“뭐가.”

 

“나 너 걱정돼서 온 거야, 준수야. 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무슨 일 있나 해서.”

 

“난 너 보고 싶어 하면 안 돼?”

 

 

 너는 맨날 그랬잖아. 준수의 말에 잠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할 말을 고르는 듯 신중한 낌새였다. 이윽고 다시 숨을 들이켠 소리와 함께 말이 이어졌다.

 

 

“돼. 그리고… 나는 너가 날 보고 싶어 하면 어디든지 갈 거야. 또 어디든지 데려다줄게.”

 

“그렇게까지는 괜찮은데.”

 

“나한테는 중요해. 처음이니까. 준수 네가 날 보고 싶다고 한 건.”

 

 

 …그래서 지금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 비밀이야. 이 동네에 살지 않는 전영중은 길목이 어색할 텐데도 길을 곧잘 들어갔다. 오히려 밤눈에 어두운 준수가 동네를 알아보지 못했다. 전영중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전영중과 성준수는 각자의 목표가 달랐음에도 지금 이렇게 한 곳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게 참 아이러니했으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쌀쌀해진 밤공기도 꽤 마음에 들었다. 개중 가장 좋았던 건 전영중의 냄새였다. 변태 같은,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양아치치고는 무색무취에 가까운 그 향이 오히려 성준수를 동하게 만들었다. 전영중이 그런 사람이라 전영중을 보고 싶어 했다. 제 나름의 질투도, 짜증도, 서운함도 다. 그런 전영중이라서. 조용한 밤이라 자그마한 소리도 큼지막하게 들리는 것이 좋았다. 전영중의 숨소리와 심장 고동을 들으며 성준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저에게는 꽤 크나큰 일탈인 이런 순간도, 제법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이크가,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꼈던 것도 같다.

 전영중이 바이크를 멈춰 세운 곳은 절을 닮은 장소의 입구였다. 동네로부터 많이 멀어진 것 같지는 않은데, 처음 보는 곳이라 준수가 눈을 크게 떴다. 고도가 높은지 조금 쌀쌀하기도 했다. 영중이 몇 걸음 걸어가 준수를 향해 뒤돌았다. 준수야, 여기 봐. 준수가 더듬더듬 영중을 향해 걸었다. 순간 빛무리가 저 아래 아롱거렸다. 어때? 영중이 어깨를 나란히 붙여왔다. 그러자 다락에서 몸을 부대끼고 앉았을 때처럼 순식간에 열기가 훅 끼쳤다.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었음에도 심장이 답답하게 뛰는 것 같았다. 준수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영중이 가리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중앙에 원중고등학교가 보였다. 그 주변으로 동네들이 아롱아롱,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들이 조금씩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인위적인 조명과 하늘의 별이 경계 없이 어우러져 보이는 곳이었다. 준수가 빠져들듯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영중이 그제야 준수의 팔뚝을 잡아챘다.

 

 

“이 동네의 야경도 나름 아름답지?”

 

“어?”

 

“서울에, 야경이 예뻐서 가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여기의 야경을 꼭 한번 보여주고 싶었어. 그때부터? 응, 그때부터. 준수가 더 반짝거리는 것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영중은 올곧을 만큼 별과 가로등의 불빛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저를 보고 있지 않은 영중의 눈이… 참 오랜만이었다.

 

 

“난… 아까 전화로도 말했지만, 너랑 계속 있고 싶어. 다른 친구들이 필요 없을 만큼.”

 

“……그래.”

 

“필요하다면 어떤 관계를 갖다 붙여놔도 돼. 선생님이라고 백 년은 더 부를 수 있어. 아니면, 너랑 어울릴 수 있도록 바꿀게.”

 

 

 영중의 동공이 바람결을 따라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성준수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숨을 꾹 참아냈다. 양아치도 주먹질도 혐오하던 성준수가 처음으로 마음껏 받아들인 게 전영중이었다. 아무리 ‘양아치 새끼들치고’라는 부사를 앞에 갖다 붙여 보아도 이미 전영중을 그 자체로 곁에 둔 후였다. 오히려 쟤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친구 없이 독고다이로 이곳을 떠날 생각만 하던 성준수에게 전영중은 처음으로 이 동네의 미련이 된 것이었다. 첫 번째 친구이자 첫 번째 그리움. 그 전부를 받아들였더니 스스로 바꿔 보겠다고 말하는 것이 웃겼다. 네가 그렇게 노력해서 바뀌지 않아도 우린 이미 많이 섞여 버린 거야.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며 찬 바람 탓에 빨개진 영중의 볼을 쿡 찔렀다. 이제야 일방적이던 시선이 맞닿는다. 어쩌면 교차하던 게 마주친 것도 같았다. 전영중, 너는….

 

 

“넌 정말 이상한 놈이야.”

 

 

 전영중이 어떤 거리낌도 없이 활짝 웃었다.

 

 

“맞아. 그리고 그런 나한테 어울려 주는 준수 너도 이상해.”

 

 

 이상한 것들끼리 만났구나. 우리 둘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 같았다. 참 이상해. 웃기는 놈이야. 그러면서도 없어선 안 돼. 그게 정말 이상하단 거야. 서로가 서로를 왜 받아주는지조차 모르는 채 한참을 마주 보았다. 사방이 고요한 새벽에 숨소리만이 공기 가득 채워졌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또, 이상하다는 표현을. 성준수도 결국 활짝 웃은 영중을 따라 여태 참던 웃음을 하나둘 뱉어냈다. 스스로 어색한 웃음소리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눈까지 질끈 감아가며 웃다가 다시 눈을 뜨니 놀란 영중의 바보 같은 얼굴이 보였다.

 

 

“야, 나도 소원 하나 빌자.”

 

“…응?”

 

“넌 나한테 두 개나 빌었잖아. 나도 하나 좀 빌자고.”

 

“뭔데? 당장 꺼지라거나 서서히 꺼지라는 것만 아니면 다 들어줄 수 있어.”

 

 

 겨우 웃음을 그친 준수가 입 안에서 언어를 굴려 보았다. 달큰한 것이 마치 사탕을 씹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영중아, 너 오래오래 날 따라와. 너야말로 외국인지 뭔지 다른 사람 따라 떠나지 말고. 기어코 성준수는 제 겉을 두르고 있던 모든 기준을 깨부수고 전영중을 옆에 두고야 만다. 그것을 실체화한 언어가 내뱉어졌다. 그랬더니, 전영중이 그 어떤 야경보다 더 훤한 빛으로 밝게 웃었다. 생전 처음 보는 미소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성준수가 삐걱거리는 몸을 애써 일으켜 저만치 날아간 구식 바이크를 다시 세웠다. 어젯밤 비가 온 모양인지 길바닥은 온통 진흙탕이었다. 매일 정성스레 빨래하고 다려입는 교복이 진창 더러워졌다. 과일 트럭을 몰던 아저씨가 뒤에서 무어라 외치는 것 같았지만 지금 성준수에겐 전영중에게로 향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저번과 비슷한, 데자뷔 같은 상황이었다. 살짝 늦은 하교 탓에 과외 시간에 늦을까 싶어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마당에서 10년은 더 된 구식 바이크를 다시 써 보겠다며 청소 중인 명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락으로 향했다. 그랬더니 약속한 시각 삼십 분 전, 문자가 왔다. 오타가 가득해서 내용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지금 어디에 있고 집회를 하는데 좀 늦어져서 오늘은 못 갈 것 같다, 미안하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무표정하게 화면을 내려다보던 성준수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 살짝 놀랐는데, 전영중이 무리를 이탈하는 건에 대한 집회라는 내용 탓이었다.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이후 저녁을 먹으라고 부른 명철에게 준수는 밥을 먹다가 무심코 양아치가 무리에서 빠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명철은 할머니가 준수에게 몰아주었던 고기를 자연스레 집어 먹고선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한 번 날 잡고 두들겨 맞으면 보내줘.

 영중이 보냈던 장소가 대체 어딘지 모르겠어서 한참을 헤맸더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한 번도 시끄러운 적 없던 동네가 유달리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준수가 타고 나온 구식 바이크는 바로 아까 전 명철이 청소 중이었던 그 바이크였다. 준수가 중학생일 적, 철없던 명철이 바이크 타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으므로 준수는 명철의 예사로운 대답을 듣자마자 숟가락을 내팽개친 채 뛰쳐나올 수 있었다. 오래된 바이크가 탈탈탈 소리를 내며 힘겨워했다. 야, 좀만 더 버텨, 좀만. 준수가 알기론 조금만 더 가면 너른 공터가 있었다. 논으로 바꾸려다 땅이 하도 척박해 자랄 풀도 안 자랐다던 그곳. 앞을 향해 갈수록 조용하던 동네 속에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들리는 것도 같았다.

 

 

“전영중!”

 

 

 그리고 정말 공터에서 약 일 대 십칠로 처맞고 있는 전영중을 발견했을 때, 성준수는 이성을 잃고 바이크 채로 공터에 뛰어들었다. 살짝 낮은 지대로 바이크가 날듯이 내려앉자 전영중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이런 씨발 전영중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바이크는 그대로 진흙탕에 처박혀 생명을 다했지만 성준수는 성공적으로 전영중의 앞을 가로막아 설 수 있었다. 전영중이 못 볼 것을 보듯이 성준수를 올려다보았다. 뭐, 뭐야 준수야? 너가 왜 여기…. 흩어졌던 양아치 새끼들이 성준수 한 명뿐인 걸 확인하고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아니, 씹. 양아치는 무리 빠지려면 처맞아야 된다는 소리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걸 뭘 태연하게 문자 하고 앉았어? 너 안 일어나?”

 

“아니 대체 그런 걸 누구한테 들은 거야?”

 

 

 준수 너 그런 거 싫어하잖아. 영중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우리 아빠. 준수가 손목에 감겨 있던 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전영중을 감싸고 선 십칠 쪽 사람이 성준수를 알아본 듯 수군대기 시작했다. 애초에 교복을 입고 나타난 것부터… 아니, 얼굴을 안 가린 게 문젠가. 쟤 성준수 아니야? 원중 선도부장. 기어코 실명이 거론됐다.

 

 

“준수야…. 너 이러면, 이번엔 정말로 학교에 소문 다 나. 그냥 다시 돌아가. 나 괜찮아.”

 

“야, 영중아.”

 

“응….”

 

“너 선생이 학생 버리고 튀는 거 봤냐?”

 

 

 나야말로 괜찮아, 멍청아. 성준수는 이미 함께 새벽을 보냈던 그날부터 각오를 다진 참이었다. 전영중과 계속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낼 바엔 그냥 화끈하게 까버리고 붙어 다니는 편이 더 나았다. 또, 사실 성준수에 관하여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하지 않은 게 있었는데. 성준수는 본인이 싸움을 싫어하고 양아치 무리를 혐오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피를 닮아 싸움에는 소질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름 날리던 날라리 성명철의 피가 어디 가겠느냐며. 이는 어머니가 준수를 데리고 가지 않고 명철에게 두고 간 이유에도 한몫했다. 너 내가 여기 오는 게 싫었으면 과외를 째지 말았어야지. 준수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영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 진짜 성준수…. 저런 바이크는 또 어디서 구해 와서.

 

 

“성명철이 타던 거라 오래된 거야. 니 거가 훨씬 낫더라.”

 

“…….”

 

“…….”

 

 

 …성명철? 순간 영중은 물론이고 그 일대가 싸늘해졌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서늘한 적막에 준수가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뭐야, 갑자기? 십칠 쪽의 수군거림이 더 거세졌다. 금세 덤벼오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맥 빠지는 상황에 준수가 영중을 돌아보았다. 너 성명철을 어떻게 알아…? 영중 또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이게 뭔 소리지? 내가 아빠를 아는 데에 별다른 이유가 필요했던가…?

 

 

“전영중 너도 알잖아…?”

 

“나야 알긴 알지. 소문으로만 들어 봤어. 이쪽에서는 전설 같은 사람이라. 근데, 그래서 네가 어떻게 아냐는 말이야.”

 

“…아니, 잠깐만. 뭐라고?”

 

 

 대청마루에 누워 효자손으로 등을 긁던 성명철을 떠올렸다. 뭔설? 전설? 영중아… 니가 맨날 과외 끝나고 피해서 가야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성명철이다…. 황망한 마음에 이마를 짚었다. 야, 성명철… 우리 아빠야. 성준수의 발언에 저편에서 힉, 하는 비명이 들린 것도 같았다. 십칠 쪽 사람들이 하나둘 사색이 된 채로 열을 맞추어 섰다. 성준수가 성명철의 아들이라고? 그럼 그… 성명철의 아들이 선도부장이라는 거야? 그 수군댐에 골치가 아파졌다. 아무래도 다음날 학교에서 감당 못 할 만큼의 소문이 퍼질 듯했다. 그래도 뭐…. 어찌 보면 전영중과는 가까워지는 일이니 괜찮은 건가. 성준수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십칠 쪽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람과 똑바로 마주 섰다.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가고 사시나무처럼 벌벌 떠는 십칠들에, 솔직히 말하자면 명철이 쪽팔렸다. 아무리 속도위반이라지만 그 나이 먹고 내 또래 애들을 겁 먹인다고? 하…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 씨발….

 

 

“어, 나 성명철 아들 맞는데. 너네 지금 뭐하냐? 내 친구 건드냐?”

 

“아니 그게… 이건 전통이라.”

 

“그럼 아빠 데려올 테니까 똑같이 쥐어패 보든가.”

 

 

 상대편이 입을 합 다물었다. 영중이 준수의 소맷귀를 잡고 큰 덩치를 준수의 뒤로 구겨 넣었다. 참 쿵짝 하나는 잘 맞았다. 이윽고 저들끼리 쑥덕대던 십칠들이 전영중을 향해 다음에 두고 보자! 같은 찌질한 멘트를 남기며 떠나갔다. 각자 바이크를 한 대씩 몰고 왔는지 구린 매연 냄새가 공터를 가득 메웠다. 야, 야! 니들 다 걸어가!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가는 십칠들은 끝내 준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우리도 돌아가자.”

 

 

 어쨌든 싸우기 전에 상황이 끝나서 다행인 건가? 준수가 고개를 가로로 기울이며 생각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진흙탕에 처박힌 명철의 바이크는 이제 정말 못 쓸 듯싶었다. 쿨하게 미련을 버린 준수가 공터에 딱 하나 남은 바이크, 그러니까 새빨간 몸체를 지닌 영중의 바이크로 다가갔다. 두 번째라고 제법 익숙하게 뒷자리에 앉아 여전히 얼빠진 채 선 영중을 불렀다. 뭐해, 전영중. 너가 이딴 이유로 빠진 게 화 나서 안 되겠다. 오늘 과외 할 거니까 우리 집으로 가. 영중이 잽싸게 다가와 바이크에 올라탔다. 준수야… 오늘 구해줘서 고마워. 이걸 제가 구했다고 해야 할지 애매했으나 준수는 그냥 영중의 뒤통수를 북북 헤집었다. 근데 나 너네 아빠, 아니, 아버님 소개시켜 주면 안 돼? …이 새끼가. 결국 성준수는 오늘 한 번도 안 쓴 주먹을 전영중에게 휘둘렀다. 퍽 소리가 제법 크게 났음에도 전영중의 웃음소리가 더 컸다.

 

 

 노을 지던 하늘이 점점 캄캄해졌다. 전영중이 라이트를 켜고 성준수의 팔을 더 단단히 감아주었다. 공터까지 올 때는 영중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몰랐는데, 천천히 돌아가 보니 꽤 먼 길이었다. 바닥에 흩어진 석류알이 보였다. 그제야 오늘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실감이 났다. 성준수 진짜… 미쳤구나.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인지 영중이 작게 키득거렸다.

 

 

“왜 웃어.”

 

“아까 일 생각하니까 웃기잖아. 준수 너는 안 웃겨? 너도 다 웃어놓고….”

 

“잠시 미쳤었나 보다 싶다.”

 

“난 정말 너처럼 불량한 선도부는 처음 봐, 준수야….”

 

 

 어떻게 사람 속성이 이러지? 계속 중얼대는 영중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전영중이 악 소리를 지르며 핸들을 비트는 바람에 잠시 바이크가 휘청였다. 야! 운전 똑바로 해! 깜짝 놀라 큰 소리를 내니 영중이 억울한 듯 말끝을 흐렸다. 준수야 너가 꼬집어 놓고…. 준수가 금세 민망해져 영중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영중의 체향엔 희미한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곁을 스쳐 가는 바람이 그 축축한 흙내를 더 선명하게 전해주었다. 전영중을 구하러 가는 길에 진흙탕을 구른 저도, 그 속에서 대가를 치르고 있던 전영중도 잔뜩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것이 더러웠지만, 이상하게 성준수는 전영중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찬바람을 맞으며, 새벽을 달렸던 그날을 떠올리며. 성준수는 보고 싶다는 말 이상으로 솔직해지는 것도 제법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하지 못했던 말을 입에 담아 보았다. 준수가 더듬더듬, 제 속내를 끄집어냈다.

 

 

“영중아. 굳이 나랑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응? 뭐라고?”

 

“나 때문에 너를 그만둘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너 좋아하잖아, 바이크 타는 거. 밤바람이 시원해서 좋다며. 그때는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물과 기름이 섞인다는 소리만큼 웃기는 한 쌍이었지만, 전영중과 성준수는 물과 기름이 아니라 섞일 수 있었다. 범생이치고 불량한 성준수. 양아치치고 괜찮은 전영중. 오히려 그래서 이 관계가 시작될 수 있지 않았을까. 제가 아는 단편적인 전영중뿐만 아니라, 그 모든 전영중을 받아들인 거라고, 성준수가 그렇게 말했다. 영중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가 손을 덜덜 떨며 다시 출발했다. 잠시 덜컥댄 바이크가 서로의 마음을 표명하는 듯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영중이 준수의 이름을 불렀다. 살짝 음이 나간 탓에 큼큼대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너는 나한테 하나의 세계를 열어 준 거야, 준수야. 그 무리를 나가고 싶었던 이유는 네가 맞아. 근데 너가 생각하는 거랑은 달라. 나도… 자유를, 내가 정말 하고 싶던 걸 찾은 거니까.”

 

 

 굳이 바이크를 타지 않더라도. 축축하던 흙내가 싱그럽게 느껴졌다. 생명력 가득하던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의 입구에서 만난 전영중인데도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떠나지도 못한 채 결국 또 여기서 맞는 가을. 지겹고 쓸쓸하기만 했던 ‘홀로’의 가을이 전영중으로 인해 탄성을 지니게 됐다. 라이크랑 러브의 차이는 뭘까? 그러면 준수는 뭐가 더 좋아? 불현듯 그 음성이 떠올랐다. 이제는 잘 모르는 감정이 아니기에 답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얘가 시험을 잘 봤는지 못 봤는지는 모르지만. 전영중은 저에게 대답해 주었으니. 준수가 영중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익숙한 길목으로 접어들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입에서 말을 굴리기도 전에, 탄성을 가진 마음이 먼저 튀어 나갔다.

 

 

“…좋아해.”

 

“……어?!”

 

“나도 좋아한다는 말이 더 좋은 것 같다, 영중아.”

 

 

 이번엔 정말로 바이크가 우뚝 멈춰 섰다. 급브레이크로 그 등에 이마를 박은 성준수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성준수 너 진짜…! 전영중이 씩씩대고, 성준수의 웃음소리에 반응하듯 옆집 개가 짖어댔다. 이곳을 떠나고자 했던 우리가 지금 여기에, 그대로 존재했음에도 괜찮았다. 우리는 정반대의 세계를 떠돌다가 만난 것이었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첫 번째 친구이자 그리움. 그리고…, 처음으로 예외를 둔 사람이었다. 그러니 첫 번째라기보다는, 그래. 전영중은, 성준수의 유일한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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