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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살해, 우울증 묘사, 폭력, 부상 등을 포함하고 있으니 열람하실 때 주의 부탁드립니다.

※ 작중 등장인물은 전부 성인입니다.

 

 

 망상증을 앓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영중은 이내 입을 다문다. 삼킬지언정 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속에서 들끓는 역겨움을 짓누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이것 또한 내 망상인가?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방 안은 온통 푸른 빛뿐, 숨 쉬는 무엇도 영중의 곁을 지키지 않았다. 소리. 바삐 돌아가는 초침만이 의식을 상기시켰다. 쉼 없이 메우는 소음을 좇다 보면, 우습게도,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 영중의 망상은 시시할 뿐이다. 멍청한 문답을 거듭 나열할 필요가 없었다. 영중은 엇비슷한 상념 속에서 여타 다를 바 없는 것을 꿈꾸곤 했다. 못내 사랑하던 이와의 교재, 연인과의 입맞춤 같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어진 시답잖은 놀이는 그가 어른이 된 후에도 변치 않았다. 다만 머리칼을 헤집는 손, 이따금 맞붙어 오는 입술 따위가 한낱 머릿속이 아님을 증명했다. 전영중은 행복하다. 이 문장에 거짓 하나 없었다. 낮에는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고, 밤늦게까지 사랑을 말하는 순간이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숨어들어 즐기는 공상 따위, 눈앞의 연인 앞에서는 볼품없다. 다소 창백한 낯, 곧게 뻗은 눈꼬리 위로 그은 선명한 쌍꺼풀, 반쯤 감은 눈 밑 깊게 자리 잡은 음영, 선명한 눈동자. 그의 전학 이후 영중이 수십 번 그려왔던 얼굴. 생존을 위해 바삐 뛰던 열일곱의 어느 날, 그는 스스로 타박한다. 없는 사람을 부러 생각할 여유는 없다. 그럼에도 전영중은 수없이 상을 지우고 만들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림과 공 사이를 보며 전부 내쳤고, 한참 뭉개 닳아빠진 겉을 도로 쥐었다. 부산에서 뛰고 있을 너를 상상한다. 미적지근한 겨울 속 너를 생각한다. 잊을 수 없는, 돌아갈 수도 없는 네 걸음에 발을 겹쳤다. 거리와 달리 영중은 어느 때보다 그와 가까웠다. 아, 열일곱의 그가 내뱉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구나. 고등학교, 아니면 유년 시절부터 이어져온 감정은 변치 않으리라. 스물다섯의 전영중 또한 확신한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형태에 얽히지 않아 교묘히 파고든 무형의 사랑. 우리는 형질보다 깊은, 개념에 비슷한 것을 나누고 있었다. 만일 벗어난다면, 무엇으로 우리를 명할 수 있을까. 길게 내뱉는 숨이 무겁다. 고개는 천천히 제 옆을 향한다. 영중이 손을 뻗자 검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잠결에 찌푸리는 눈 밑이 어둡다. 그는 천천히 눈가를 어루만지다, 점차 밑을 향한다. 눈에서 뺨, 입으로. 손에 닿는 감촉이 이상하리만큼 서늘하다. 창백한 피부를 연신 덧만졌으나 제 밑의 남자는 가만 누워있을 뿐이다. 영중은, 호흡을 골라, 느릿하게 손을 펼쳐 남자의 숨을 틀어막는다. 앞이 흐려 표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연신 입 위에서 흐트러지는 손에, 강하게 쥐길 반복했다. 영중의 무릎 밑 시트가 양껏 구겨진다. 전영중. 손 틈 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낮다. 눈은 여전히 뜨일 기미가 없다. 손에 들어가는 힘이 버겁다. 잘게 떨리는 손 밑 입술이 다시 움직인다. 영중아, 씨발 뭐하냐. 그제야 영중은, 손을 옮겨, 눈가 위 머리카락을 재차 정돈한다. 손가락마저 떼어내자 얼핏 움직인 얼굴은 도로 멎는다. 눈은 감긴 채였다. 째깍대는 소음만이 귓전을 때린다. 짓누르는 압박감은 정적과도 같다. 잘게 떠는 손마저 멈출 때쯤, 영중은 떠올린다. 내게 자초지종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은. 전영중은 되돌아 의심한다. 저것은. 내 앞의 저것은 사랑하는 성준수가 맞을까. 성준수의 시체가 스물다섯 구가 되는 날이었다.

 시체를 처음 목격한 것은 여름 초순, 창밖으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성준수는 간만에 창밖을 들여보고 있었다. 틈새로 빗방울이 쏟아졌으나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성준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몸을 앞으로 빼어 너머를 지켜볼 뿐이다. 공기에 묻는 물비린내가 짙다. 흔들리는 풍경과, 몰아치는 폭우. 사이로 번지는, 거대한 군중…. 성준수는 하염없이, 쉴새 없이 변하는 그것들을 응시하다 돌아섰다.

"…어때."

"그저 그래."

 아니야. 영중은 내심 타박한다. 걸어오는 성준수의 걸음이 유독 비뚤었다. 발 하나 옮길 때마다 붙는 속도가 더디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발을 펴, 들었다 때기를 반복했다. 영중은 일어나 몇 오지 못한 준수를 향했다. 성준수는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뒤틀린 발을 바깥으로 기울인 채로. 무엇 하나 얹지 못한 채 응시하자 이내 고개가 들린다. 축축한 얼굴 속 표정이 분간 가지 않았다. 영중이 시선 속 준수는, 못 본 사이 음울했던 낯이 더욱 가라앉았다는 것뿐이다. 교통사고, 갑작스러운 은퇴. 성준수의 삶은 발목 하나 돌아간 채 테두리 밖으로 내몰렸다. 삶은 지나치게 고요했고 성준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일상생활을 위해서라도 재활은 해야겠지만, 복귀는 어렵습니다. 성준수는 의사의 말에, 네, 작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앞서가는 성준수의 머리가 지나치게 흔들렸다. 어긋나던 목발 소리가 멎는다. 마저 돌릴 수는 없고요? 평탄한 어조에 의사는 되묻는다. 무엇을요? 내 발목을 처 잡고 끼워 맞출 수 없냐고 묻잖아. 성준수의 숨은, 끊어질 듯 간신히 진료실을 조이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성준수의 인생은 그저 집을 벗어나지 못한 채 헛돌 뿐이다. 영중은 준수의 눈가를 닦아냈다. 손가락에 옮는 온기 하나하나 마디를 옭아매는 듯했다. 춥지, 옷 가져올까. 겨우 뱉은 말 한마디에 준수는 어, 한 마디만 남긴 채 창을 응시한다. 아, 성준수는 삶을 열망한다. 교묘히 짜인 비극 따위 들여다보지 않을 태도를 다짐한다. 영중은 오른쪽 발목 뒤, 길게 자리 잡은 준수의 수술 자국을 흘끗 훔친다. 차마 오래 머물지 못한 시선은 걸음을 옮겨 준수의 방으로 향한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리지 않았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택배인가? 최근에 시킨 적 없는데. 준수를 바라보자 그 또한 고개를 저었다.

"누구세, 요…."

"씨발… 꼴이 말이 아니네."

 예상과 달리 밖에는 검은 코트를 걸친 남자가 서있었다. 다소 창백한 낯, 곧게 뻗은 눈꼬리 위로 그은 선명한 쌍꺼풀, 반쯤 감은 눈 속 선명한 눈동자.

 문밖의 그것은, 틀림없는 성준수였다. 비뚤게 입꼬리를 올린 낯은 고개를 기울인 채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에 든 것도 좆같고."

 문밖의 남자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온다.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피하지 않는 눈은 성준수의 것과 닮아 있었다. 남자가 영중을 밀치고 현관 안으로 들어온다. 명치에 깊게 치받은 주먹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정확했다. 멋대로 침입한 행동거지부터, 영중의 몸에 꽂은 주먹까지. 기다렸다는 듯 흘러가는 움직임이 기묘했다. 풀리는 다리를 억지로 딛으며 몸을 세운다. 남자는 성준수의 멱살을 잡아 거세게 끌어당긴다. 고함이 울린다. 중심을 잃은 준수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다 멎는다. 남자의 몸에 기댄 성준수는 움직임 하나 없다. 남자는 준수의 목 근처에서 무언가 뽑아 들더니 도로 밀었다. 창백한 목에 길게 뻗은 선이 이내 부풀더니,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찰나. 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바닥을 적시는 피가 멈추질 않았다. 안돼, 안돼 안돼…. 영중은 바닥에 버려진, 숨이 붙은지도 모를 것의 목을 필사적으로 누른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가 흥건하다. 안돼, 제발. 마주한 몸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끝없는 심장 고동이 귀를 메운다.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거실을 메운다. 바닥을 끄는 듯한 묘한 소음이 거슬렸다. 제발, 제발…. 전영중의 입이 고장 난 듯 읊조렸다. 뜻 없는 문장이 수없이 흘러간다. 호흡 하나 가누지 못한 채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앞의 광경을 믿고싶지 않았다. 성, 준수. 기도에서 가까스레 기어 나온 이름.

"틀려."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낸 그것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간다. 얼굴을 뒤덮은 선홍빛이 역겨웠다. 붉은 손가락이 남자 본인을 가르킨다.

"내가 성준수야."

알겠어?

전영중.

"악몽이라도 꿨냐?"

"…, 어?…."

"씨발 전영중아, 악몽 꿨냐고."

 이마에 닿는 손이 차갑다. 손가락이 영중의 미간 위를 옅게 문지른다. 인상 펴, 내가 죽이기라도 하냐?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성준수는 환히 웃고 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영중의 싸늘한 목을 두어 번 매만졌다. 영중은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그곳은 하얀 벽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누워있던 곳 또한 거실이 아닌 자신의 방임을 깨달았다. 베개에 반쯤 얼굴을 묻고 있던 성준수가 기어코 몸을 일으킨다.

"방금까지 좋다가 왜 지랄인데."

"…."

"말을 해. 입 닫으면 내가 어떻게 아냐."

 식은 손에 얽혀오는 손가락이 창백하다.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거짓이라 치부하기에 그것은 무서울 정도로 생생했다. 영중은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그는 담담하게, 평소를 가장한 어투로.

"네가…."

"내가."

"살해당했어."

 허나 두 눈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좀 전의 잔상이 겹쳐오는 듯했다. 발을 적신 핏자국이 선명했다. 영중이 눈을 두어 번 뜨자 웅덩이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모습을 감춘다. 성준수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중은 부러 입을 다물었다. 고즈넉한 방 속 공기가 텁텁했다. 순간, 고개가 들렸다. 성준수는 여전히 미소 짓는 낯이었다. 그거 참,

"바보 같은 꿈이네…."

 성준수는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상기된 얼굴이 익숙하지 않았다. 영중은 한참을 말을 골랐으나 끝내 맺지 못한 채 성준수를 바라보았다.

"야, 전영중. 그냥 좆같은 꿈이잖아."

 성준수가 소리 내어 웃는다. 구김 하나 없는 미소가 눈에 밟힌다. 그는 숨어들어 홀로 파묻히지 않았으며 어둠 저 편을 보며 흐느끼지도 않았다. 표정 하나 없는 얼굴, 바르지 못한 걸음걸이조차 희미해진다. 어쩌면 내 망상일 수 있겠지. 그러나 영중은, 좀 전까지 붙잡던 목의 감촉을 기억한다. 모순적이게도 그것은 차갑게 가라앉기는커녕 거세게 타올랐다. 제 목숨을 값으로 영중의 뇌리에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나는, 성준수는 이곳에 존재한다,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잊어. 전부. 그 악몽도, 시체도."

 스미는 불안감이 숨을 옥죈다. 그래, 거짓이 아니다. 이유를 논할 순 없으나, 영중은 막연한 확신에 차올랐다. 머릿속 순간이 계속된다. 손 밑의 자상, 잡아끄는 듯한 구둣발, 초인종 소리, 그리고…. 야, 괜찮아. 성준수가 답한다.

 어차피 이곳엔 우리밖에 없어.

 마주치는 눈동자.

 

 

 그것이 성준수의 첫 번째 살인이었다. '성준수'는 옳지 않다. 분명 성준수의 탈을 뒤집어쓴 무언가겠지. 영중은 하얀 거실 벽을 쳐다본다. 혈흔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으나 위치만은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다. 꿈으로 칭하지 않는 까닭은 단순했다. 사랑하는 연인이 살해 당하는 모습을 떠올릴만큼 영중의 일상은 천박하지 않았다. 연인에 대한 이상한 욕정이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다만 영중은 정체불명의 그것과 여름밤, 창을 내다보던 준수 중 후자의 편을 들어준 것뿐이다. 성준수를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전영중은 문득, 추상적인 관념에 대해 떠올리곤 했다.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있다면, 전영중은 시간과 감정을 고를 것이다. 한낱 감성팔이는 아니었다. 사람은 겹친 시간에 따라 상대 폭을 따라 걸을 수 있으며 동일한 감정을 나누며 간극을 좁히기도 한다. 말 하나로 상대의 전부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는다. 초등학교부터 준수와 발을 맞췄던 전영중은 떨어진 삼 년을 통해 어렵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끝없는 갈망. 성준수를 이루는 것은 타오르는 열망이었다. 두려워도 발을 내딛고, 넘어질지언정 고개 하나는 쳐드는 녀석. 연고 하나 없는 부산행, 부원 수 빠듯한 코트 위에서 기어코 증명 해내던 사람이 준수다. 잊다, 이 나지막한 울림은 그와 가깝지 않았다. 간단하고 손쉽게 이루어지는 문장 하나로는 안녕을 담을 수 없다.


 영중이 사랑하는 준수가 사라진다. 뇌에 고일 여지조차 없이 흘러내린다. 울지언정 끝내 나아가던 너는, 어느 순간 존재하지 못해 점차 변질되는 것이다. 어떤 날은 난도질당하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공중에서 추락하기도 했다. 그것은 느릿하게 준수의 자리를 처리해갔다. 하나, 둘, 수 십, 수 백번. 그것은 몇 번이곤 영중의 눈 앞에 무참한 시신을 들이밀었다. 이게 '성준수'의 말로라는 듯,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전영중 속 성준수의 끝을 고한다. 아, 웃던 얼굴만큼은 눈이 시릴 만큼 비슷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아득한 기억의 너머. 교통사고가 나기 전, 코트 위에서 버저비터를 넣던…. 숨죽여 타오르지 않던 네 낭만의 순간은 마지막으로 포장된다. 그렇게 너를 매듭짓는 절차 안에서조차, 나는 끔찍하게도, 네가 남긴 찬란함보다 말로 따위를 연상하는 것이다. 작별을 고할 수는 없을까. 애원을 비롯한 투정이었다. 성준수를 표방하는 괴물이라면, 기회 정도는 주지 않을까. 차갑고 붉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다. 울지 마, 전영중.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그리웠다. 정확히는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숨까지 완벽히 흉내 낸, 텅 빈 목소리가 아니라. 영중은 울고 있었다. 표정 하나 구겨지지 않은 채 그저 쏟아질 뿐이었다. 그는 제 안에서 무언가 터져 나옴을 느꼈다. 슬픔은 아니었다. 절망이나 원망 또한 아니었다.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입안을 맴돌았다. 성준수는 말없이 눈물을 닦아냈다. 얼굴을 겉돌기만 하는 손짓은 폭력과도 같았다. 한참을 움직이던 그것은, 원형조차 남지 않은 시신과 함께 영중을 끌어안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영중 형, 약은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해요."

 아.

 달싹이는 입술이 파리하다.

"아이, 나도 형이 관리 잘하는 거 아는데! 준수 형이 엄청 부탁했어요. 개꼴아도 전영중 약은 챙기라고…. 엥, 방금 반말 한 거 아니에요! 알죠?"

"용서해라, 전영중. 조재석이 총대 메고 말하는 거니까. 나도 어제 전화 열 번 받았다."

"아니 씨발 성준수에게 번호 팔아 재낀 새끼 누구야."

"교진아 말이 심하다. 그래도 전학 전까진 같은 부원이었잖아."

 저녁 시간의 고깃집은 사람들의 우스갯소리로 가득했다. 한기를 피해 모인 사람과 술기운으로 몸을 데우려는 사람. 연말 속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떠돌이까지.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생동감 넘쳤다. 말을 이으려는 지국민에게 집게를 옮겨 받은 조재석이 능숙하게 고기를 올렸다. 재석이 좋아하는 소고기였다.  하나둘 취기 오른 목소리로 가게 안이 떠들썩해질 때 즈음, 휘성이 미닫이를 닫는다. 문틈 넘어오는 말소리는 듣기 좋은 정도로 활기찼다. 제431회 원중고 동창회 (비공식). 카드에 쓰여있는 반듯한 문구가 한심하다. 영중이 눈동자를 굴린다. 사방이 온통 하얗다. 박교진이 기대있는 벽, 다섯 뼘 위. 준수 혈흔이 있었는데. 영중은 가늠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손가락 옆에 있는 거스러미가 거슬렸다. 손톱으로 긁어봤으나 정돈은커녕 더욱 번지기만 했다. 지국민의 손이 영중의 손을 조용히 덮었다. 영중은 그제야 방 안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준수 형이 영중 형 엄청 사랑하나 봐요.

"전영중이 초딩도 아니고 씨발 왜 우리가 멀쩡히 두 손 달려있는 애 약을 처먹어야 하는데. 알아서 먹겠지."

"사랑하면 단속? 하고 싶은 타입? 인가 보죠. 이게 준수 형 식? 사랑? 아닐까요?"

"재석아 너도 좀 아닌 거 같지."

"네. 근데 기상호 말, '크큭…. 지상고의 전설, 악귀 준수 햄이 다른 방향으로 부활한 것인가….' 라던데요. 걔네도 엄청 시달리는 듯."

"아니 씨발 성대모사 존나 잘해. 재석아, 너 올스타에서 이거 해라."

 시끄러웠다. 오가는 말도, 분위기도. 영중은 불판 밑 화염만을 바라보았다. 미세한 푸른 빛이었다. 영중 앞에 술잔이 놓이곤 했으나, 줄지 않는 잔에 휘성이 대신 물리곤 했다. 영중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마음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원하지 않았으니 보이는 것도 없었다. 국민의 손은 진작 떠났으나 영중은, 어딘가에 제 손이 묶여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살이 많이 내려앉은 손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 그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어쩌면 그편이 좋을지도 몰라. 영중은 문득 그리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준수도 그것에게 죽지 않을 테니. 전부 사라질 꿈이라 믿는다면, 현재의 준수는 안전할지도 모른다. 불판 속 화마는 고요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기름을 따라 몸부림친다.

"그런데 저는 이해가 안 돼요. 준수 형 그런 성격 아니었잖아요? 물론, 사랑하면 변하는 사람이 있다지만… 이건 걍 다른 사람이 된 수준 아니에요?"

 소란스러운 안을 가라앉힌 것은, 재석의 질문 하나였다. 가게 안은 어느덧 정적에 휩싸였다. 영중은 슬쩍 테이블 너머를 살펴보았다. 돌을 던진 당사자는, 뭣 모른 채로 야무지게 쌈까지 만들어 먹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딸깍, 금속 맞부딪치는 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그 형, 예민하긴 해도 없는 걸 만들어서 긁는 타입은 아니던데요. 고삼 때야 뭐… 준수 형 잘못이 없단 건 아니지만 심정은 이해 가요. 영중 형이랑 종종 투닥거리긴 해도 사이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그냥 사이 좋아 보였어요. 이렇게 극성, 음… 선을 넘진 않았는데요, 둘 다."

"재석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넌 성준수랑 만난 적도 없잖아."

 이어지는 말에 휘성이 의아한 낯으로 묻는다. 무거운 공기가 영중의 가슴께를 눌렀다. 국민이 재석의 손에서 집게를 도로 빼앗았다. 당황한 듯 쥐었다 폈다 하는 손이 부산스럽다.

"아잇, 있어요! 연습 경기도 자주 했고. 청첩장 돌리는 겸 축하 파티했잖아요. 그, 어."

딸깍. 엎어둔 고기를 자른다.

딸깍 딸깍 딸깍.

씨발 잘 안 되네.

딸깍.

딸깍,

딸깍.

"아닌 거 같아요."

 영중이 고개를 든다. 재석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렇지?"

"네, 준수 형 진짜 영중 형 사랑하는 듯."

 보기 좋게 잘린 고기가 재석 앞에 가지런히 놓인다. 전부 날 것이었다. 재석은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젓가락에 묻은 피가 흥건했다. 재석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방 안은 다시 실없는 대화로 가득 찼다. 영중은 갑작스레 몰려오는 굉음에 귀를 틀어막았다. 고였던 소리가 일순 터져 나오는 듯한 크기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이 귀를 메운다. 지긋지긋하다. 소리는 손 틈 사이로 지나 뇌 한 켠을 갉아먹는다. 웅성거리는 소리, 형상. 온갖 것이 한데 얽혀 분간 가지 않았다. 창 너머를 응시하던 너, 문을 넘어온 너. 코트 위의 너, 전학을 결심하던 네 등까지. 성준수의 모든 것이 곯아 썩어가고 있었다. 겉모습만 오려 붙인 그것이, 성준수를 대체한다. 흔적도 없이, 마치, 응당 그런 것처럼. 격동의 순간, 영중은 한 가능성을 생각했다. 자신이 고안했음에도 허무맹랑한 가설로 읽혔다.

"……었어?"

 소란스러운 실내 속 몇 쌍의 눈이 그를 향한다.

"어제는 현실이었어?"

 영중을 제외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를 마주 보며 난처한 기색을 흘렸다. 속이 들끓었다. 꼬인 머릿속이 돌아오지 않았다. 영중은 닥치는 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가짜야. 이 가게도, 너희도. 그 성준수까지. 준수는 우리 집에서 죽었으니까. 내가 직접 눌렀으니까 확실해. 성준수는 죽었어. 어제도, 그저께도. 이번 여름에도. 정돈되지 않은 말은 두서없이 쏟아져 흐른다. 처음부터 정교한 위조였다. 그 녀석이 마음대로 노닐 수 있는 판에 불과했던 것이다! 앞에 있는 동창, 심지어 준수마저 유희 거리 이상이 아니었다. 모든 건 단지 잠겼다 떠오르는 상일 뿐이다. 여지를 남긴 채로, 느릿하게 깜빡이는 꿈에 가까운 현실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어제, 준수 형 전화 받았다고 아까 다 같이…."

 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커지는 심장박동이 주위를 삼켰다.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만이 영중의 안을 채운다.

"성준수는 전화 같은 거 안 해. 연락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이 남으니까. 통제하기도 어려워. 무엇보다도, 도망치면 처리하기 어렵잖아."

 목적은 변한 적 없었다. 준수를 없애는 것, 오직 그것뿐. 그렇다면 수고를 들여 구태여 사람 앞에서 처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단 하나의 동기가 있다면. 수단에 불과한 목적이라면 결말은 변한다. 사건이 아닌 희극으로 전락한다. 영중이 탄식한다. 이 살인 현장에는 존재해서 안 되는 존재가 셋 있었다.

하나, 동일 인물인 범인과 피해자.

둘, 어떤 사실에도 의심을 가지지 않는 주변 인물.

셋.

현장을 목도했음에도 살아있는 목격자.

"그러면…. 보여줄 수 없잖아. 성준수를 죽여도 만족할 수 없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

"내 안에서 완벽하게 준수를 지울 수 없어…."

완연한 정적.

영중아.

 아, 하얀 벽이다. 다시 하얀 천장. 벽을 덮은 혈흔을 쫓아 눈을 굴렸다. 성준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막 안은 온통 긁는 소리로 가득했다. 준수가 여섯 번째에 끌려가며 났던 소리랑 비슷했다. 아니 스무 번째였나. 구역질이 올라왔다. 창백한 얼굴에, 눈 밑 깊게 자리 잡은 음영, 수척한 팔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뒤틀리는 속을 느꼈다. 혐오스러웠다. 의도를 모를 무표정이며 다문 입술 따위가. 이제서야 사람 흉내를 내기라도 하듯 들여다보는 저 눈알을 도려내고 싶었다.

"씨발 좆같게."

 성준수가 얼굴을 찌푸린다.

"좆같으니까 쳐다보지 마…. 살인마 새끼."

 성준수가 관망한다.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로.

"지우려 하지 마, 부탁이야…. 많은 걸 바라지 않을게. 그냥, 그냥…."

 내가 사랑하던 일부를 기억하게 해줘.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흐린 시야가 어지럽다. 감기는 눈이 무거웠다. 영중은 수차례 깜빡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처럼 잘 수 있을 거 같아. 거쳐온 불면을 뚫을 정도로 긴 수마였다. 영중은 꿈을 꾼다. 현실을 망각할 옛날로 파고든다. 유독 습했던 그날은 여름치고 해가 짧았으며 파도 또한 거셌다. 저녁 구름 밑, 이제는 식어버린 아스팔트를 밟으며 영중은 걸었다. 이따금 밀려드는 물결 따위가 발을 간지럽혔다. 준수는 영중보다 조금 앞에 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종의 배려였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투박한 기다림에 기대 속도를 늦춘다. 야, 빨리 안 오냐? 마지막에 들려오는 타박마저 소중했다. 하지만 준수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영중은 속으로 되물었다. 네가 건네는 포장 하나 거치지 않은 진심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분명 영중은 평생을 사랑할 것이다. 성준수, 이름을 부르면 따라붙는 시선. 선선한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까지.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스물하나의 전영중이 속삭인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도로 위를 덮는다. 나는 네게 완벽한 사랑을 전하고 싶다. 누구도 감탄할만한 낭만적인 사랑을 안겨주고 싶었다. 어쩌면 너조차 모를 시간 속 깊은 마음을 건네리라 마음먹곤 했다. 이런 푸념은 네 앞에서 무너진다. 막무가내로 차려 입고, 내키는 대로 속삭이고 싶었다. 너는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 내 이상을 버리게 하잖아. 마주 안은 온도가 따스했다.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멍청아, 그런 걸 왜 물어보냐. 성준수가 영중의 목에 짧게 입 맞춘다. 볼을 쓰다듬는 손이 천천히 움직인다. 넌 욕심이 존나 많아서, 매번 머뭇거리잖아. 살짝 올려다보는 눈이 휘어진다. 입술이 맞닿는다. 벌어진 틈 사이로 혀가 얽혔다. 밭게 흐르는 숨소리가 급하다. 떨어진 간격에 타액이 길게 이어진다. 준수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뗀다. 영중아, 지금도 망설이냐? 준수가 한껏 상기된 영중의 귀를 느릿하게 매만진다. 이어지지 않는 답에 준수가 중얼거린다. 이제 와서 부끄럽냐.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준수는 자신을 단단히 끌어안은 몸에 기댔다. 들려오는 심장 박동이 유독 빠르다. 영중아 시끄럽다. 준수야, 제발 좀 조용히 해…. 어느덧 무릎 위를 덮은 파도가 부딪친다. 잠기지 않은 너머를 향해 퍼지던 얇은 너울은 낮은 턱에 막혀 산산이 부서진다. 수평선을 머금은 도로는 끝이 없을 정도로 아득했다. 칠흑 같은 밤에 맞물린 바다, 산란하는 달빛. 전영중은 그것들을 입 안에 담았다. 어린 날을 핑계 삼아 네게 내보인다. 성준수, 평생 그리울 거야. 난 네 말대로 욕심이 많으니까. 고등학생 때와 하나도 안 변했어. 매번, 아니. 이상을 바랄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준수는 영중의 등을 쓸어내렸다. 선연한 온기가 느껴졌다. 야, 맘껏 이용해라. 안 질릴걸. 계속 기다려 줄게. 영중은 조금 밑에서 마주치는 눈동자 속, 거대한 무언가를 마주한다. 요동치는 섬광. 우리는 어떠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시간을 넘어선, 우리를 얽는 필연적 울림. 언어를 빌리는 것은 순간만으로 충분했다.

"나도 너 사랑하거든."

 그러니 앞으로도 함께하자.

 충동이라 여기던 시절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토록 과분하고 진실된 충동이 어딨을까. 그렇다면 기껍게 속으리라. 형질보다 가까운, 네가 정의한 무체에 눈을 감은 채 치기 어린 영원을 받아들인다. 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매 순간 너를 그리워하겠지. 다만, 네가 있다면. 나를 허물고 머무는 네가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억겁을 거쳐도 나는 바래지 않을 거 같아.

 

 

"안 지워져."

 여름. 지독했던 그날의 여름이다. 코에 스치는 물비린내가 선명하다. 영중이 눈을 뜨자 피로 낭자한 거실이 들어왔다. 깜빡이는 티비 화면은 노이즈가 연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파도 소리와 잡음이 뒤섞인다. 옆에 앉은 그것은 고개를 숙인 채 멈춰있었다.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영중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도 사람들은 뭉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영중과 그것, 모든 것이 둘을 제외한 채로 정지해있다. 모형에 불과한 세계는 참으로 기이했다.

"씨발…. 전영중, 저게 네 머릿속에서 좆같이 안 사라진다고."

 평이한 말투였음에도 흐느낌에 가까웠다. 검게 침잠한 눈빛이 서늘하다. 창백한 눈가 밑은 긴 눈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호흡이 거세지더니 까득거리는 소리가 연신 울린다. 리모컨을 누르는 손짓이 신경질적이다. 손짓에 맞춰 화면이 변한다. 그곳엔 오직 성준수만이 존재했다. 장소, 계절, 시간. 쉼 없이 변하는 영상 속 준수만이 머문 채 서 있었다. 성준수 세 글자에 뒤돌던 그는. 이내 추락한다. 때론 난도질당하며, 교살당한 채로. 내가 사랑하던 너는 그렇게 죽음을 맞는다. 성준수는 거뭇한 피를 거쳐, 막연한 어둠으로 잠긴다. 무수한 화면이 꺼질 때쯤, 그것은 손을 멈춘다. 액정 안에는 그날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유독 길었던 저녁, 미적지근한 공기. 바다내음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던…. 버튼 누르는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영상은 끊기지 않고 재생된다. 성준수가 다가온다. 서툴게 보폭을 겹친다. 맞잡은 손이 유독 선명하다. 이윽고 프레임이 되돌아간다. 네가 불어넣은 감정이, 넘긴 순간이. 안에서 영생을 품은 채 산란하고 있었다.

"분명 전부 죽였는데."

 이거만 안 사라지네. 퍽 감흥 없는 목소리다. 화면 저편으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돌이킬 수 없는, 돌아갈 곳 없는 휘몰아치는 해수를 향해 치닫는다. 전영중은 하염없이, 화면을 응시한다. 이게 우리의 연이구나. 우리를 구성하는, 서로로 존재하게 하는 파아란 파편. 엉겨 붙은 무형의 존재. 쪽빛 물보라에 아스라한 작별을 담는다. 안녕, 성준수. 나는 아마 평생을 걸쳐 사랑하겠지. 때론 네 사랑에 기대 헤매기도 할 것이다. 지워진 네 일부조차 나는 잊지 못해, 처음으로 되돌아 네게 회상하겠지. 전영중은 짧고, 느리게 눈을 감는다. 무언의 한 켠에는 시기 늦은 작고를 덧붙였다. 그러니 부디 지금처럼 나를 붙잡아주기를. 덧없이 내 안에 살아 숨 쉬며, 우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영중아, 네가 너무 가엾다."

 일순, 소리가 멎는다. 그것은 해체하듯 영중의 안면을 훑고 있었다. 충혈된 눈과 시선이 맞는다. 불행히도 영중은 깨닫고 있었다. 촌극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영중의 안에, 준수가 살아있는 한은. 파편을 갈아 끼우기 전까지 필름은 돌아간다. 출연자가 극을 마칠 수 없다면 답은 하나뿐. 화면, 스크린 너머. 무대에서 내려와, 바보 같은 연기를 하며, 극을 넓히는 것뿐이다. 이형의 장소를 넘어 현실로 찾아가면 막이 내려간다. 뇌리에 불안이 스민다. 그것은 모처럼 검은 코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폭우가 몰아치던 밤, 문 밖의 존재로 되돌아가 있었다. 불현듯 직감한다. 성준수가 죽는다. 화면 너머, 참혹한 현실 속에서. 완벽한 종막을 위해 심장이 도려내질 것이다. 침묵 속에서도 머리만은 기민하게 움직인다. 전영중의 답 또한 하나뿐이다. 극 자체를 무너트리면 된다. 영중은 모호한 낯을 걸친다. 성급하면 안 된다. 숨을 비틀 적절한 때를 위해 기다려야 한다. 전영중은 의연한 얼굴로, 당장이라도 게우고 싶어 역류하는 감정을 삼켜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저딴 망상에 시간 허비하는 게 병신 같아서."

 곁눈질로 코트 주머니를 확인해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은 자상이었지. 살펴도 날붙이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영중은 생각한다. 이것은 '성준수', 전영중의 애인을 모방하는 존재는 확실하다. 그러니 도리어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살며시 맞잡는 손, 서툴게 몰아붙였던 키스 따위로. 연인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듯, 살해한 다음이면 살을 붙이며 더욱 애틋한 척 구는 것이다. 그것이 학습한 다정일지, 뒤틀린 본심일지는 영중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틈을 찾아야 한다. 성준수를 위해, 완벽한 살인을 위해. 자신을 호의적으로 볼 때 끝내야 한다.

"망상은 아니야. 너도 봤잖아, 내… 기억."

 그것은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영중을 향해 손짓한다. 함께 소파에 걸터앉은 상황이 익숙지 않았다. 첫날, 악몽이라 치부하라던 밤 이후로 얼굴을 마주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것이 영중의 셔츠 카라 근처를 잡더니 거세게 끌어온다. 가까워진 거리에 영중이 찌푸리자 장난스레 웃더니 손을 놓았다. 불 꺼진 거실 속 빗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창밖에 스미는 달빛에 의존해, 둘은 말없이 서로만을 응시한다. 평온한 숨소리가 이질적이다. 상대가 팔을 둘러 천천히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무너진 자세가 신경 쓰였다. 전영중, 가만히 있어. 나른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집중해. 부드럽게 미간을 쓰는 감촉이 생경하다. 좁은 틈새, 반 뼘 남짓한 사이로 시선이 얽매인다. 참 똑 닮은 얼굴이다. 눈물 자국이 없었더라면 감쪽같이 속았으리라. 보채는 팔에 몸이 마저 겹친다. 심장박동이 지나치게 거셌다. 마주 안은 품은 모순적이게도 따뜻했다. 등을 쓰는 손길이 다정하다. 영중아,

"…아직도 그게 현실이라 생각하냐?"

 폭우가 이어진다. 억세게 내리치는 빗발이 빼곡하다. 마주친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슬픔에 저민 눈동자가 까맣다. 싫어도 먹어. 꾸준히 먹어야 효과 있다. 떨어진 고개가 어깨에 닿는다. 매달리듯 따라붙는 손길이 집요하다. 틈 하나 없이 맞붙은 몸이 불쾌하다. 우습게도 제게 붙는 건 온전한 애정이었다. 갈구하고 있다. 전영중을. 사랑과 온기를, 역을 뒤로한 채 성준수는 몰두하고 있었다. 살 너머로 미약한 맥박이 들린다. 불규칙적이었다. 상반신을 일으켰다. 준수의 얼굴 위로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영중의 손이 준수의 눈 밑을 맴돈다. 떼었다 붙는 손 밑으로 자욱이 선명하다. 손가락이 자욱을 따라, 밑으로, 이어 선을 그린다. 곧은 직선이 볼을 통해, 턱, 목으로 이어진다. 살갗을 따라 느껴지는 붕 뜬 시선, 가둔 움직임 따위가 거슬린다. 흘러나온 숨이 가볍게 떨어진다. 입 맞춘다. 짧고, 가벼운 행위가 자욱 위를 덮는다. 움찔거리는 몸 위로 열이 오른다. 속에 파고들어 바투 잡은 채 준수의 목을 따라 연신 입이 붙었다 떨어진다. 준수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운다. 뭉근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몸을 일으킨 영중이, 귓가에 속삭인다.

"있잖아."

 옆으로 떨군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거짓말하지 마…. 나도 굉장히 불쾌해."

 좋아하는 거 같지도 않은데. 비스듬한 고개를 짓누른다. 영중은 머리를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이 가는 소리가 선명하다. 처박힌 머리를 쥔 손목에 손이 붙는다. 피부 위로 기다란 상처가 빼곡하다. 손톱 사이로 붉은 피가 물들어 있었다. 거봐, 이럴 정도면서. 영중은 속으로만 되낸다.

"정말 나랑 연인 놀이나 하자고 벌인 짓은 아니겠지…. 이런 건 내가 아니어도, 성준수가 아니어도 할 수 있잖아. 왜 이런 짓을 해? 남의 머리를 헤집어가며, 누군가를 완벽하게 따라 할 이유가 없잖아."

 손 밑의 존재는 성준수가 아니다. 사고를 지닌 생명체다. 의사를 표하며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인간에 가까웠다. 누군가와 별개의, 독자적인 인격이었다. 자의로 만들 수도, 모방할 수도 없는 존재. 성준수도 아니고 전영중도 아닌, 무언가. 떨리는 손이 멎질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눈앞에 자리잡은 성준수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대답해. 너는, 대체, 누구야…."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권태로운 음성으로 나지막이 지껄인다.

"성준수."

"연기하지 마."

"씨발 그건 네가 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네 망상 속 성준수를 이해한다 자부할 수 있는 거야. 감정에 상대를 끼워 넣고, 지나치게 몰입해 자신조차 속이잖아. 능숙하고 완벽하게."

 하지만 그것은, 타인을 부정하는 것 아닌가. 부정하다 못해 멋대로 곡해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 자신을 대입하여 남을 거울삼아 연민하는 행위일 뿐이다. 영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역을 뒤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몰두하고 있었다. 자리 잡고자 하는, 완벽한 성준수로. 자신을 억지로 뒤바꿔 틈새에 욱여넣고 있었다. 준수의 목소리가 낮게 침잠한다.

"야, 사람은 절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해. 눈에 비친 착각을 상대라 여기며 영원을 사는 거야. 너야말로 거짓말하지 마. 네가 정말 그렇다면, 그렇게 믿는다면…."

 수차례 끊어지던 말은 이내 닫힌다. 떨어진 고개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작고, 조용히. 숨죽여 흐느낀다. 성준수는 울고 있었다. 처절한 감정이 방백을 메운다. 폭풍이 몰아친다. 비는 어느새 창을 때리고 있었다.

"…왜 나에겐 속아주지 않아? 대체 왜? 네가 날 지워도, 다시 만들어도 닥치고 있었는데…. 너를 갉아먹은 저 망상까지 긁어 없앴는데도 너는, 왜… 대체 왜, "

 고개가 움직인다. 눈물이, 자욱을 따라 길게 떨어진다.

"영중아,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끝마친 순간, 달려든 몸이 부딪힌다. 창백한 목을 힘껏 조인다. 촌극은 그저, 자기연민에 불과했다. 우습게도 그것은 성준수의 탈을 뒤집어쓰고, 전영중의 기억을 훔쳐 자신을 속인 채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전영중의 속에서 우연히 찾아낸, 단 하나의 영원! 성준수를 도려내, 그를 향한 애정을 말미암아 불멸을 열망하던 것이다. 손 밑의 맥박이 뚜렷하다. 틀어막는 손에 숨이 흐릿해진다.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이다. 모든 것이 가짜인 세계 속, 유일하게 감각만은 깨어있었다. 떨어지는 침이 손을 적신다. 틈새로 희미한 신음이 이어진다. 고통에 발버둥 치는 움직임이 섬찟하다. 일순, 몸이 크게 움직인다. 이내, 고개를 떨군 그것은, 한참을 긴 시간 동안 망연히 붙박인다. 천장을 향한 얼굴에 음영이 드리운다. 푸르스름한 빛이 방 안에 번진다. 멎었다. 숨을 끊은 것이다. 영중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숨을 고른다. 사람을 죽였다. 아니, 자신의 안에, 교묘히 비집고 나타난 무언가, 괴물을….

"저건, 대체, 뭐였던 거지…."

 흔들리는 몸을 일으켜 발을 딛는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애처롭다. 그것이 처음 등장한 문을 향해, 영중은 힘 없이 흔들린다. 비는 어느덧 멎은 채, 바람만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흔들리는 손목을 잡아 손잡이에 올려놓는다. 손에 닿는 서늘함이 꿈이 아님을 증명했다.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몸이 기운다. 목을 잡아챈 힘이 숨을 틀어막는다. 그것이 영중의 셔츠 카라 근처를 억세게 쥐었다. 으스러질 거 같은 중압감이 영중을 덮쳤다. 그것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기괴하다. 안돼, 전영중.

"네가 여길 나가면 난 더 이상 성준수가 아니잖아."

 그것은 영중의 몸을 힘껏 벽에 내치길 반복했다. 벌어진 입 사이로 신음이 흘렀다. 부딪친 머릿속 사고가 둔해진다. 코트 자락을 붙잡는 손에 다시 한번 거세게 치받는다. 야, 영중아 애쓰지 마. 너는 나 못 이겨. 바깥이면 모를까. 그것의 입술 틈새로 비소가 흘러나온다. 하나, 둘, 넷, 아홉. 떨리던 영중의 손이 점차 멈춘다. 주먹 쥔 손 안쪽, 바른 손톱자국이 선명하다. 영중의 몸이 힘없이 흘러내린다. 준수가 옷깃 쥔 손을 조심스레 펼쳤다. 고꾸라진 몸을 끌어안는 손길이 퍽 다정하다. 우습게도 그것은 화사하게 웃는 낯이었다. 그는 손을 옮겨, 피가 엉겨 끈적해진 머리카락을 정돈한다. 뒤이어 준수는 명확한, 그러나 뜻 모를 노래를 중얼거린다. 숨 쉬는 무엇 하나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옷매무새를 정돈한다. 검은 코트 끝단이 휘날린다. 구두 소리 사이로 끄는 소리가 섞인다. 성준수가 뒤돌아 멈춘다.  영중아.

"처음부터 우리 둘밖에 없었어. 열일곱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는 그렇게 믿어. 네 머릿속에는 너와 나밖에 없던 거야. 돌아오는 답은 없다.
성준수는, 움직이지 않는, 제 한쪽 발을 이끌며, 천천히, 문을 연다.

 

 

 성준수의 하루는 이러했다. 아침을 맞은 그는 날짜를 확인한다. 탁자에 놓인 작은 달력에 가위표를 그었다. 칸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마지막이구나. 마지막. 그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잠시 곱씹던 준수는 나갈 채비를 했다. 목에 닿는 하얀 코트의 감촉이 생경하다. 길거리는 온통 지나치는 사람뿐, 멈춰선 이는 없다. 떨어지는 낙엽이 길을 덮는다. 병원으로 가는 걸음이 더디다. 503호 병실, 환자 전영중. 성준수는 문을 열었다. 밝은 창 앞에 지수가 앉아있었다. 뜨개질하는 손짓이 유독 서툴다. 지수는 코의 순서를 고민하다, 문을 여닫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한참을 쭈뼛대던 지수는 다소 음울한 얼굴로 안부를 묻는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많이 핼쑥해졌네. 뒤이어 긴 팔 틈새로 보이는 준수의 손목 도처를 훑는다. 깔끔했다. 성준수는 지수의 걱정 어린 말을 일축하곤 병상을 살폈다. 전영중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의사가 돌려놓은 것은 발목 하나뿐, 그 이상을 해내지 못했다. 그마저도 제대로 끼우지 못해 바깥으로 어긋나 있었다. 준수는 지수를 돌려보낸 후, 의자에 앉았다. 하얀 병실에 볕이 들어온다. 몰아치는 하얀 빛에 몸을 움찔거린다. 아, 성준수는 잠들지 못했다. 교통사고 이후 그는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성준수는, 무력히 흐르는 시간만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었다. 홀로 틀어박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유지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무색하게도. 성준수의 종착지는 병실로 향한다. 전보다 야윈 팔 근처에서 잠을 청하면, 불현듯 그날이 생각나는 것이다. 중앙선을 교차하는 스퀴드 라인. 쏟아지는 유리창. 자신을 끌어안는 전영중…. 숨을 쉴 수 없었다. 불안정한 호흡을 느끼며, 가빠진 숨을 고르는 게 최선이었다. 폐를 짓누르는 압박에 성준수는 밖으로 달려가 역한 속을 긁어냈다. 든 것 없는 빈 속에 투명한 침만이 연신 떨어졌다. 정신없이 속을 게우다 보면, 남몰래 묻어두었던 여름날까지 절로 들추는 것이다. 살인마라 했었지. 영중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원념에 가까운 두 눈을 떠올린다. 꺼진 의식 너머에서조차 저주하고 있던 건가. 네게 가누지도 못하는 발목을 남긴 것을, 아니 어쩌면, 그로 인해 선수 생명조차 끝내버린 일까지…. 풀린 초점이 허공을 맴돈다. 나사 빠진 머리는 현실을 망각한 채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면 계속 원망하지. 준수의 입이 달싹인다. 외치지 못한 소리는 곪아갈 뿐이다. 너는 왜 내게 부탁했어. 왜 막연히 마지막을 생각하게 만들었어. 너를 잊으려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러나 세상은 의사와 상관없이 그저 비루하고 저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성준수는 자신이 깊은 어둠으로 향하는 걸 느꼈다. 더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 오늘은 잘 수 있을 거 같다. 준수는 옷매무새를 정돈한다.

 하얀 병실은 어느덧 어스름한 붉은빛으로 변해있었다. 나가기 전, 주변을 살피던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걸렸다. 준수는 다가가 의자 위에 놓인 물건을 집었다. 단정한 리본과 투명한 포장지 안에 든 것은 목도리였다. 체크무늬가 그러진 검은 목도리 사이로 흰 봉투가 포개져 있었다. 준수는 포장을 뜯어 펼쳐보았다. 정갈한 글씨로 적은 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오빠 내일이면 생일이네. 날이 많이 추워졌어.
이맘때쯤엔 늘 눈이 내렸는데 이번에는 오지 않을 생각인가 봐.
어쩐지 조금 섭섭하지 않아?
목도리는 어때? 엄마랑 같이 고른 거야.
직접 뜨려 했는데 보이기 민망할 정도라 줄 수 없었어.
내년에는 영중 오빠 몫까지 같이 선물할게.

사실 있잖아 오빠, 다들 보고 싶어 해.
부모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재유 오빠, 병찬 오빠, 상호랑 다른 지상고 오빠들, 현성 감독님도….
태성 오빠는 화내는 거 있지? 자기 청첩장 돌리는데 얼굴도 안 비친다고.
전하 결혼식 때 얼마 보낸 줄 아냐고 하더라.
매번 느끼지만 태성 오빠는 늘 솔직하지 못한 거 같아.
사실 나도 그렇겠지. 눈앞에 있는데도 이런 글을 남기니까.
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게 한심하지?
오빠에게 나는 늘 울보에 겁쟁이인 걸까….

싫어하는 거 알지만 내일은 집에 잠시 들를게.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
갑자기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그래도, 오빠
그래도 말이야.

내가 문을 두드리고, 마주 선다면…
오빠를 찾아간다면,

내일 오늘처럼 인사해줄 거지?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병실을 메운다.

 

 

 눈을 뜬 것은 새벽, 사방은 온통 푸른빛뿐이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밝다. 허망함을 가질 새도 없이 준수는 묘한 소리를 듣는다.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다. 간격을 둔 울림은 일정하게 퍼졌다. 소리는 점점 커져 귀를 울린다. 준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몽롱한 시야에 한참을 비틀거린다. 어느샌가 작아진 소리는 현관 밖에서 넘어오고 있었다. 문득, 소리가 멎는다. 준수는 둔한 사고로 상황을 이해하려 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환청이었나. 적막한 공기가 무겁다. 준수는 걸음을 물렸으나 이내 몸을 숙여 현관문 렌즈를 들여다보았다. 동생의 우는 얼굴이 끝내 밟힌 탓이었다.

 창 안에는 전영중이 있었다. 검은 코트 차림의 영중이 발을 디딘 채 존재했다. 준수가 줄곧 그리워하던, 옅게 미소 지은 낯으로. 찬 바람에 에린 귀가 발갛다. 왼손에 들린 다발 위로 흰 장미와 백합이 흐드러져 있었다.

분명, 전영중이다. 하지만 어떻게. 의식이 돌아온 건가? 이것조차 꿈인가? 필사적으로 약 기운을 떨쳐냈다. 그러곤 있는 힘껏 제 팔을 짓눌렀다. 날카로운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미약하나 고통이 느껴졌다. 거짓이 아니다. 준수가 중얼거렸다. 전영중이 돌아왔다. 함께하던 이곳으로. 수년간의 잠에서 벗어나 돌아온 것이다. 심장박동이 거세진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다. 기울이는 찰나.

 성준수는 불현듯 깨닫는다.

"준수."

 전영중은 왜 들어오지 않는가. 여상한 목소리가 흐른다. 전영중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더니, 이내 돌아온다.

"준수야?"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유했던 비밀번호를 모를 리가 없다. 병원에서 곧장 온 것이라 쳐도 제게 연락은 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으니 말이다. 붕 뜬 뇌 안쪽이 가라앉는다. 노크하듯 반복되던 소리. 침몰하던 몸을 일으킨 단 하나의 소리. 현관 바깥에서 기어 오던 울림. 바깥에 서 있는 전영중.

"성준수."

 찾아온 것이다. 전영중의 낯을 한 무언가가. 기이할 정도로 침착해진다. 현대 의학으로 타인의 외양을 정확히 구현할 가능성은 없다. 전영중은 근 몇 년간 병실에서 보냈으니 그를 현재 모습을 알 인물도 적었다. 가끔 얼굴을 비추는 제 동생 정도만 알 터이다. 그렇다면, 이건 누구인가. 완벽한 전영중의 안면을 붙인 채 제 앞에 나타난 이는 누구란 말인가. 성준수는 문에서 거리를 둔 채 생각한다. 강도면 대담한 새끼고, 장난이라면 찢어 죽일 새끼다. 수면제에 절은 뇌여도 그 정도 사고는 가능했다. 전영중일리는 없다. 단순한 직감이었다. 성준수는 집 안을 훑는다. 배트는 너무 크고 커터칼은 너무 작다. 서랍에서 식칼을 꺼내든다. 성준수는 직감을 신뢰한다. 칼이라도 쥐지 않으면 더욱 불안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이함이 몸을 휩쓴다. 문을 향해 발을 옮긴다. 전영중은, 욕심이 많아 망설일지언정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선연해 끝없이 갈구하곤 했다. 문을 열었지 밖에서 서성일 녀석은 아니었다. 그러니, 저자는, 저것은. 본연 하나 지니지 않은 채, 전영중의 탈을 뒤집어쓴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성준수는 문고리를 잡는다. 서늘함이 눌어붙는 듯했다. 어느덧 말소리는 멎어 있었다. 성준수를 기다리듯, 입을 닫은 채 서 있었다. 피할 수 없다. 막연한 생각이 그를 뒤덮는다. 전영중을 표하는 무언가라면 막아야 한다. 전영중의 인생을 망가트린 책임이라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일이리라. 성준수는, 칼날을 뒤로한 채, 천천히 문을 연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 문밖의 그것은, 틀림없는 전영중이다. 비뚤게 입꼬리를 올린 채 제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나보다 조금 작네."

 열기가 몸에 퍼진다. 뇌리를 꿰뚫는 통증이 느껴진다. 성준수는, 흔들리는 시야로 제 밑을 바라본다. 하이얀 꽃 사이로 번뜩이는 칼날이 보인다. 꽃잎 사이로 떨어지는 피가 유독 붉다.

"씨발, 너, 너… 뭐야."

 다시 한번, 칼날이 꽂힌다. 날붙이를 쥐는 손을 잘라낼 듯 재차 치받는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발악이 거슬린다. 떨어진 꽃 위로 피가 쏟아진다.

“대체, 누구냐고….”

 성준수의 손은 간신히 어깨를 붙잡은 채 매달려 있었다. 노려보는 얼굴을 가로막은 채 버티는 것조차 버거웠다. 혈흔이 영중의 얼굴을 가로지른다. 눈가를 지나, 밑으로, 일자로 떨어진다.

“…전, 영중, 얼굴로….”

 방백.

 침묵이 사이를 파고든다.
전영중은, 시체를 넘어, 거울 앞으로 걸어간다.
얼굴에 엉겨 붙은 피가 유독 날카롭다.

 잔잔한 면이 전영중을 비춘다.


 거울에 비친, 다소 창백한 낯, 곧게 뻗은 눈꼬리 위로 그은 선명한 쌍꺼풀, 반쯤 감은 눈 밑 깊게 자리 잡은 음영, 선명한 눈동자.

“성준수.”

 손을 움직여 피를 닦는다. 가는 선은 얼굴 옆으로 퍼져, 이윽고 면이 된다.
 

 그는, 극을 마무리하는 환한 미소로 문장을 맺는다.

"내가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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