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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패티 치즈 버거 하나요.”

 

주문을 마친 여성은 미심쩍은 눈으로 눈앞의 청년을 훑어보았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눈빛은 영 흐리멍덩한 게 딱 봐도 소매치기가 선호할 상이다.

 

“네, 카드 꽂아주세요. …결제 되셨습니다.”

 

상대의 무례한 평가도 모르고 영중은 영혼 없이 문장을 읊었다. 포스기를 조작하는 손끝이 둔하다. 기실 그가 이처럼 얼이 빠져 있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시간 전, 눈을 뜬 영중은 웬 패스트푸드점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은 몽롱했고 몸이 지면에서 반쯤 떠 있는 듯했다. 다가온 점장이 그에게 새빨간 앞치마와 모자를 씌웠다. 그는 혼몽한 상태로 카운터 앞까지 운반되었다.

 

안녕하세요. 주문하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자동응답기가 된 영중은 작은 의구심을 느낀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는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꿈에 부푼 새내기였는데…….

 

그러나 TV와 스마트기기는 우리의 표류자를 향해 엄중하고도 적확하게 선언한다. 지금은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3년 뒤의 미래다.

 

손님이 빠지자 유난히 정수리가 뾰족한 점장이 그를 직원 휴게실로 끌고 들어갔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내일까지만 여기 있어요. 같이 사는 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까.”

 

영중을 타이르는 그의 관자놀이에 땀이 맺혀 있었다. 한겨울에 저렇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니, 기저질환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튼 영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데리러 온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아하니 3년 뒤의 자신은 직장도 있고 집도 있는 모양인데 그럼 됐지….

 

…된 거 맞나?

 

사고가 드문드문 끊긴다. 자리로 돌아온 영중은 짧게 머리를 털었다.

 

“저기요.”

“아, 네. 주문하시겠어요?”

 

고개를 든 영중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상대는 그가 살면서 본 사람 중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다. 칼같이 주차된 이목구비가 유별나게 입체적이다. 평범한 사람들과 섞여 있으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수려한 미남이었다.

 

“허.”

 

남자는 예고도 없이 영중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에 영중의 눈이 깜빡, 감겼다 뜨인다. 영중의 얼굴을 본 남자가 헛웃음을 쳤다.

 

“이거 정신 못 차리네.”

 

상대의 반응을 보니 그는 영중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점장이 쭈뼛대며 말했다.

 

“어음…. 원래 얘기했던 것보다 일찍 오셨네요….”

“어쩌라고.”

“아, 아닙니다…….”

 

남자는 비어 있는 테이블을 힐끗 보더니 영중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뻔뻔한 태도에 하마터면 속아넘어갈 뻔했다. 얼굴값 좀 하는 놈인가?

 

지금 영중은 근무 중이고 그의 옆엔 점장이 서 있다. 영중은 잠자코 카운터를 지키기로 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선택이었으나 주변의 반응은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남자는 적반하장으로 얼굴을 구겼고, 점장은 무서운 걸 본 것마냥 황급히 영중의 등을 떠밀었다.

 

“뭐, 뭐하세요?! 빨리 가시지 않고!”

“…저 일하는 중인데요?”

“새끼, 근로 계약서도 안 썼으면서 존나 성실하네.”

“예? 점장님, 저 사대 보험 안 돼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분이 선생님 데리러 온다던 분이에요.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점장은 그새 십 년쯤 늙은 얼굴로 남자에게 영중을 떠넘겼다. 이쯤 되면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영중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얼굴이 원체 폭력적인 탓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는데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정장 차림이었다.

 

상대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었다. 품평하는 듯한 시선이 영중을 위에서 아래로 훑는다. 과하게 잘난 얼굴, 험한 말투, 거리낌 없는 태도. 자신이 어떤 경위로 그를 알게 되었는지가 의문이다. 영중은 반신반의하며 질문했다.

 

“…저랑 같이 산다는 분 맞으세요?”

“어.”

“그, 사장님께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제가…….”

“니 뭐.”

“…하……. 아니에요.”

“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

“해 봐. 말 안 되는 소리.”

 

슬며시 시선을 들면 턱을 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여태 보인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눈은 가느스름하게 접혀 있었다. 그제야 영중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안다. 그리고 내게 호의를 갖고 있다.

 

영중은 짧게 숨을 고르곤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과거에서 왔는데요.”

“뭐?”

 

영중의 말에 남자가 짤막한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기대가 무색하게 냉담한 반응이다. 영중은 양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기적절하게도 내내 흐리던 머릿속이 빠르게 개고 있었다. 차라리 조금 더 멍청한 상태로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상대를 바로 앞에 두고 저가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했는지 곱씹는 건 말도 못 하게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영중은 애써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

 

“아니, 됐어요. 방금 얘긴,”

“틀렸어. 미래로 온 게 아니라 니 기억이 날라간 거지.”

“그냥 농담 한 번 해본… 뭐라고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그의 말엔 시종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놀랍게도 내내 사나워 보이던 얼굴이 느슨해져, 영중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일순 시선을 빼앗긴다. 갑자기 남자가 얼굴을 바꿔끼운 양 정색했다.

 

“하씨, 하필이면 이때냐.”

“…저, 그러니까 형 말씀은 제가 기억상실이라는 말인가요?”

 

영중의 말에 남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기분이 상했나 싶었는데 잘 보니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대충 그렇지.”

“사고라도 당한 건가요?”

“아니.”

 

그는 제 의문점을 다 알고도 부러 답을 미루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나랑 밀당이라도 하자는 건가? 영중이 눈썹을 구기자 그가 선심 쓴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가 지웠거든. 네 기억.”

“……뭐라고요?”

 

그가 손깍지를 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혀가 남자의 마른 아랫입술을 짧게 훑었다.

 

“한 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니랑 나는 같은 팀이고, 주업무는 외계인 불법 체류자 새끼들 치우는 거야.”

“외계인…?”

“그리고 니 기억은 니가 이 짓거리 더 이상 못 해먹겠다고 하도 지랄… 난리 치길래 내가 지워줬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되고.”

“기억을 지웠다니? 사람이 말이 되는 소릴 해야….”

“돼. 이게 기억소각기라는 건데… 아씨, 바쁜데 걍 들어.”

 

남자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검은 막대기 같은 것을 꺼내더니 대뜸 화를 냈다. 누가 봐도 장난감 같이 생긴 걸 두고 무슨 약을 파는 건지…. 영중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얼굴이 아까울 따름이다.

 

“아무튼 난 지금 니랑 사귀는 걔가 아니고 5년 뒤에서 왔는데,”

“…사귀……? 제가… 그쪽이랑?”

“야, 여물고 처들으라고 안 했냐?”

“아니, 이 얘길 듣고 어떻게 그냥 넘어가?!”

“어쭈? 말 깐다?”

 

영중은 이를 악물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외계인 어쩌고는 잘 몰라도 저와 남자의 관계가 그닥 평화롭지 않았으리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영중은 반항심 반, 억울함 반으로 항의했다.

 

“저 여자 좋아하는데요?”

“확실해?”

 

그는 대놓고 비웃었다. 딱히 반박할 필요도 없다는 듯한 태도다. 영중은 이 화제가 자신에게 불리함을 직감했다. 결국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근데 왜 저는 기억을 못 하는데요?”

“내가 기억 지웠다니까.”

“어떻게요?”

“이 기계로…. 이 씨발, 너 지금 안 믿지?”

“아니, 솔직히 믿을 만한 말을 해야…. 그리고 아무리 이유가 있대도 그렇지, 본인 애인 기억을 어떻게 지워요? 그게 말이 돼요?”

“왜 안 돼? 실제로 내가 했는데.”

 

대놓고 불신하는 눈초리에 남자가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이 창밖을 향한다. 어디도 아닌 곳을 응시하며 남자가 말했다.

 

“…니가 내 얼굴 보는 게 지긋지긋하대서.”

 

순간 영중은 정말로, 그를 믿을 뻔했다. 그의 얼굴 위로 드리운 음영이, 번진 햇살이 몹시 애틋한 빛을 띠고 있었으므로.

 

고로 영중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남자는 사이비나 정신이상자 대신 배우가 되어야 했을 텐데.

 

“저기, 거짓말을 할 거면 좀 성의 있게 하죠?”

“뭐?”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그쪽 얼굴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다니 그게 말이….”

 

영중은 급하게 입을 다물다 혀를 깨물 뻔했다. 혀가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은 모양이었다. 남자의 웃음소리에 영중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제 쪽을 보라는 듯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린다.

 

“여자 좋아한다며?”

“됐어요.”

“야, 내 얼굴 마음에 드냐?”

“진짜 애인이면 이미 알 거 아니에요.”

“얼굴값 한단 소리밖엔 못 들었는데.”

“그것도 맞는 것 같고.”

“이 새끼가?”

 

남자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꺾었을 때였다. 그의 흰 얼굴이 경직되고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패인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 새끼 잡아야 돼.”

“무슨…,”

 

남자는 용수철이 튀어오르듯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영중은 엉겁결에 그의 뒤를 쫓았다.

 

남자는 말 그대로 쏜살같았다. 그는 직원을 밀치고 테이블을 넘어 번개처럼 주방으로 뛰어들었다. 사죄는 당연히도 뒤따라가는 영중의 몫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잠깐, 거기 기다려요! …기다리라니까?!”

 

쪽문으로 빠져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포착한 순간 영중은 강렬한 불안감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애먼 사람을 외계인이라고 패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밖으로 나선 영중의 눈에 비친 건 남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영중은 질겁해 외쳤다.

 

“야!”

 

갑작스런 고성에 행인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린다. 남자의 주먹은 간발의 차로 빗나가 모자를 스쳤다.

 

“아오, 씨발!”

“미쳤어?! 멀쩡한 사람 뒤통수를 왜….”

 

남자의 어깨를 붙들려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영중의 얼굴에 경악이 번진다.

 

모자에 가려져 있던 행인의 머리 윗부분은 텅 비어 있었다. 정확히는 열린 두개골 아래, 기계가 빼곡히 들어찬 통제실이 뇌와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고, 달팽이와 지네를 뒤섞어놓은 듯한 생명체가 수십 가닥의 촉수로 기계를 조작하고 있었다.

 

“이 씹, 전영중! 너 거기서 움직이지 마!”

 

남자가 재킷 안에서 제 손바닥만 한 총을 꺼낸 순간, 멀쩡히 서 있던 행인이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무너져내렸다. 영중은 그의 열린 머리(비위가 상했으나 영중은 그 밖의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에서 손톱만한 캡슐이 방출되는 것을 목격했다. 남자가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쾅!

 

영중은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웅크렸다. 과장을 조금 보태 지구가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었다. 쾅, 쾅쾅! 연달아 세 번을 더 발포한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씹새끼가, 하수구로 튀어?”

“…놓쳤어?”

“어. 목소리 존나게 큰 누구 덕에.”

 

영중은 입만 뻐끔거렸다.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거니와 평생동안 믿어온 상식이 한순간에 붕괴된 탓이다. 정말로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내가 헛걸 본 게 아니고?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리면 바로 저기 주인을 잃은 몸뚱이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영중은 창백한 낯으로 입가를 쓸어내렸다.

 

“뭐예요?”

“뭐 터졌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방금의 소란을 듣고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고 있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야.”

 

그가 팔만 뻗어 영중에게 선글라스를 건넸다.

 

“이게 뭐,”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째깍째깍 써라.”

 

여러 번은 무슨 한 번도 말 안 했으면서…….

 

지은 죄가 있어 영중은 현명하게 말을 아꼈다. 선글라스는 어렴풋한 형체만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새까맸다. 잘은 몰라도 일상적으로 쓰고 다닐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영중은 선글라스를 콧잔등에 걸친 채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현장에서 달아나긴 커녕 대로 한복판에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어쩌려고?”

 

남자는 영중을 흘낏 보더니 손을 뻗어 선글라스를 밀어올려 주었다. 그의 다른 한 손에 검은색 막대기가 들려 있다. 그의 말이 맞다는 전제 하에, 기억소각기다.

 

“자자, 다들 여기 보시고요.”

 

번쩍, 새빨간 섬광이 일대를 뒤덮었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갈무리하며 말했다.

 

“하씨, 길거리에서 담배 피지 말라고 했죠? 이 폭발은 다 담배꽁초 때문입니다. LPG 가스가 터졌거든요. 그럼 다들 금연하십쇼.”

 

영중이 한 박자 늦게 선글라스를 벗으며 아연한 낯으로 물었다.

 

“사람들이 그딴 소릴 믿어?”

“어, 원래 이거 맞으면 정신 없어. 니도 그랬잖아.”

“어디까지 통하는데?”

“너무 잘생긴 사람 보면 기억력이 감퇴된다는 개소리도 먹히던데. …야씨, 내가 생각한 거 아냐. 후배놈이 해보라고 해서 한 거지.”

“누가 뭐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가 영중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바람이 일 정도로 빠른 움직임에 영중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영중은 그의 의심하는 눈빛이 이내 맥없는 수긍으로 바뀌는 것을 본다. 그는 무언가…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렇게 상냥한 애인은 아니었나봐?”

“토 쏠리는 소리 할 거면 아가리 여물어라. 그래서, 이제 믿기냐?”

 

그들을 에워싼 군중은 물론, 베란다에 나와 있던 사람들까지 단체로 최면에 걸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중은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까 어디까지 말했냐?”

 

내가 네 얼굴 보기 싫어서 헤어지자고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제 무덤 파는 취미는 없었으므로 영중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헤집었다.

 

“아무튼, 니 새끼를 디뉴럴라이저에 처넣을 거야.”

“그게 뭔진 모르겠는데 나한테 좋은 일은 아닐 것 같다.”

“새끼 쫄기는…. 걍 기억 되돌리는 기계야. 미래에 니가 디트론족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보안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디트론족? 그게 뭔데?”

“또라이 범죄자 새끼들. 이 새끼들 밀입국하면 바로 소재 파악해서 깜방 넣는 게 우리 일이고. 니가 만들었다는 프로그램은 대충 지구를 멸균 상태로 유지하는 거라 그 새끼들이 들어오려고 하면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건데,”

“잠깐만. 그거 진짜 나 맞아? 나 컴퓨터 모르는데?”

“니 사고방식을 모델 삼아서 방어벽이 어쩌고 저쨌다는데 나도 잘 모르니까 자꾸 처묻지 마라, 영중아.”

 

남자는 담배가 말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난 지 채 한 시간도 안 된 영중으로선 그가 흡연가인지 어떤지까진 알 수 없었으나… 이제 그의 기분이라면 얼추 파악할 수 있을 듯했다. 그는 감정과 행동 사이에 왜곡을 두지 않는 사람 같았다. 다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내가 왜? 나 그렇게 비밀 많은 사람 아냐.”

 

그 말에 남자가 영중을 빤히 쳐다보았다. 새까만 눈동자는 미동조차 않는다. 무방비하게 간파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퍽이나.”

 

남자는 등을 돌리곤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지은 잘못도 없이 가슴이 따끔거린다. 영중은 다급히 잰걸음으로 남자의 옆에 따라붙었다.

 

“음, 그러니까 정리하면 과거의 너… 지금 나랑 사귀는 네가 내 기억을 지웠고,”

“이 지랄 났는데 아직도 사귀는 사이가 맞겠냐?”

“아무튼 재결합 했다며. 그런데 넌 그 프로그램 지식이 필요해서 여기로 왔다는 거야? 아니…. 그럼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 없이 거기 있는 나한테 물어보면 됐을 텐데.”

 

남자는 대답하는 대신 대로변에 멈춰 서 멀리 횡단보도 쪽을 노려보았다. 택시를 잡으려는 모양이었다. …디뉴럴라이저인가 뭔가 하는 정체불명의 물건에 제 목숨을 맡겨야 할 미래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영중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곧 과거의 네가 와서 기억 되돌려주는 거 아냐? 내 말은, 원래 여기 살던 너 말야.”

“지금은 니 꼴도 보기 싫어서 이쪽은 얼씬도 안 할 걸.”

“경험담이야?”

“어.”

 

어색한 정적이 맴돈다. 짧게 숨을 고르고, 그가 말을 이었다.

 

“그거 못 기다려. 내가 왜 여기까지 왔겠냐.”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영중은 자신이 비극의 바로 앞 페이지를 읽고 있음을 깨달았다. 책장이 넘어가듯 성긴 바람이 뺨을 스친다. 그가 쏟아내듯 말했다.

 

“내가 살던 시간선에서 넌 완전히 사라졌어. 나 빼곤 아무도 기억 못 해. 프로그램 가동일은 모레 새벽이고, 내일 디트론족 씹새끼가 니 죽이러 올 거다. 난 그거 막으러 온 거야.”

“…진심이야?”

“농담이겠냐? 당장 전쟁 터지기 일보직전에 날아왔는데.”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에 영중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는 현실을 볼 줄 아는 어른으로 자랐다. 맹세컨대 영웅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세계의 명운을 짊어지길 바란 적도 없다. 그런 건 결코 그의 몫일 수 없다. 알고 있지 않나. 그런 건 나보다는 —가…….

 

갑작스런 두통에 영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무언가를 잊고 있다. 아주 중요한, 그의 본질에 가까운 무언가를.

 

영중은 그제야 자신이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너 이름이 뭐야?”

 

마침 택시 한 대가 그들 앞에 멈추어 선다. 남자는 택시의 뒷문을 열고 안을 향해 눈짓했다.

 

“니가 직접 찾아와.”

“디뉴럴라이저 안에서?”

“어.”

“하…….”

 

영중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택시에 올라탔다. 이렇게 끔찍한 기분이 드는 걸 보니 기억을 되찾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남자는 창틀에 팔꿈치를 기댄 채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기분이… 좋지 않은데 좋았다. 더욱이 기묘한 것은 난생 처음 겪어 보는 감정 상태임에도 제 신체는 이 불안정함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불균형이 남자의 말에 신빙성을 더했다.

 

“참고로 본부 밖에 있는 디뉴럴라이저는 죄다 안정성 검사 안 한 사제다.”

“나 내릴래.”

“되겠냐?”

 

그가 영중의 어깨를 우악스레 잡아당겼다. 차창을 통해 들이친 빛이 그의 눈 안에서 사납게 반짝인다. 호응하듯 영중의 안에서 정제되지 않은 불꽃이 튀었다. 그들은 마치 일종의 연쇄반응 같았다.

 

마침내 만족한 듯 남자의 입꼬리가 위를 향하고, 선전 포고처럼 심장 한가운데 떨어지는 무자비한 한 방.

 

“뒈지지 마라, 영중아. 나랑 사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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