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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라는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예측할 수 없는 뜻밖의 일어나는 불행이었다. 

그러니까...사고라는 건,

 

"야...이...씨발.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

 

 성준수의 몸 위로 올라타있는 영중이 아무 말도 못하고는 입을 가만히 뻐끔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는데 솔직히 터질듯 새빨개진 얼굴 때문에 입모양 같은 건 하나도 읽히지 않았다. 길거리 농구를 하다가 발이 얽힌 채 넘어졌는데 하필이면 입술이 닿았다. 턱을 스친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말랑한 살덩이 둘이서 맞부딪혔다. 시바 뭔 말캉...! 황급히 놀란 영중이 입술을 떼고는 일어서려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것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영중과 준수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벌어진 사고였고.

 그들의 첫 번째 장난스런 키스였다.

 

 

성준수의 이야기

 제가 영중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고작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멀쩡하던 자취방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내리는 상상을 해 본적이 있을까? 참고로 저는 그런 쓰잘데기없는 상상 같은거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노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딴 상상을 왜 해? 그 시간에 공이나 한 번 더 던져. 물론 그건 제 인생에 집이 무너져내린다는 이슈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날이었다. 그 어떤 전조증상 같은 것도 없었다. 깨끗하네. 하늘. 그 날따라 하늘이 유독 파랗고 맑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갔다가 술약속이 잡혀 나오는 길이었다. 하필 지갑을 두고 와서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다 챙겼겠지...가볍게 걸친 겉옷 속 툭툭한 주머니를 몇 번 만지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 갑자기 쿵! 소리가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들렸다. 너무 놀라 뒤를 돌아보고는 도어락을 눌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 집에서 난 소리 같은데? 삑, 삑삑. 삐리릭. 잠금이 해제되었다는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저를 맞이한 것은 희뿌연 먼지 바람이었다. 퉷, 입 안으로 들어오려는 먼지를 뱉고는 두 눈을 끔뻑이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마주했다.

 

 이...시바알...... 왜 파란 하늘이 내 집 천장에서 보이냐. 파랗다고 생각만 했지. 내 집에서 직관하는 것을 바란 적은 없다고.

 

 만약 제가 집 안에 있었다면 큰 일로 이어졌을 법한데도, 현실감이 들지 않아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냥 막연히 기가 막혔다. 어느 날 갑자기 자취방 천장이 무너졌는데 어떻게 해야하나요? 내공 50 걸어요. 하고 지식인에 글을 남겨도 노래 제목 같다는 답만 돌아올 것이 뻔했다. 하...신축빌라라고 하길래 깨끗하고 깔끔한게 좋아서 들어간거였는데. 부실공사를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순식간에 집을 잃고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집 앞 공원 벤치로 가서 앉았다.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낸 사이 날이 저물어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필 집주인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몇 십분 전에 보낸 문자에 아직도 답이 없었다. 하늘은 남의 속도 모르고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이 예쁘기만 하다. 마른 세수를 하며 다리를 달달 떨며 기다리는 것도 일이십분이어야지. 생각보다 넋 나간 정신은 꽤 빠르게 돌아왔다. 일단 당장 숙식을 해결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본가로 돌아가기엔 괜히 부모님 걱정시켜드리기 싫고, 또 학교까지 꽤 거리가 있어 통학하기에는 불편했다. 

 

 연락처를 뒤적거리며 하루만 재워줄 친구를 한참이고 찾았다. 얘들은 부산에 있고... 얘는 재워달라고 하기엔 쫌... 이 선배는 안 친한데. 음...평소에도 협소하다고 생각한 제 인간관계에 순식간에 현타가 왔을 때 쯤이었다. 한참을 스크롤해대던 손가락이 초성 ㅈ에서 멈추었다. 

 

'전영중'

 

 남들 다 앞에 지상, 원중, 준향 등... 학교를 붙여둔 가운데 유일하게 앞에 별다른 수식어가 붙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만큼 가깝고도 떼려도 뗄 수 없는 사이. 그 새끼는 한결같이 지랄해도 미워할 수 없는 새끼였다. 하필이면 왜... 마음 속에 무언가라도 턱, 걸린듯 하다.  

 손가락이 머뭇거렸다. 전화를 걸어, 말어? 전영중은. 전영중이라면 받아줄 것을 알았다. 걔는 이상하기는 해도 그래도 꽤 이성적이니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면 고생 많았겠다고 한 마디 해주지 않으려나. 사실은 걔도 나를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을 걸. 은연중에 저와 비슷한 온도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는 믿고 있었다. 주춤거리던 손가락은 어느새 미끄러져 전화버튼을 눌러버렸다.

미친! 이게 왜 눌려?! 허둥지둥대며 취소할 새도 없이 착신음이 가는 3초 사이에 달칵, 상대가 받아버렸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다. 몇 개월만에 들어도 항상 잘 가다듬어진 부드러운 미성이었다. 헛기침을 몇 번 하며 갈라진 목을 가다듬고는 건네오는 목소리에 답했다.

 

"...어, 난데."

"무슨 일이야? 준수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큼, 아...야. 별건 아니고...그게, 음..."

"뭐야 준수답지않게. 뭔데?"

"나 집이 무너졌는데 좀 재워줄 수 있어?"

"뭐?!"

 

 다친데는? 농구하는데 지장 없는거 맞아? 병원부터 가자. 너 어디야? 내가 갈게. 영중이 많이 놀란 듯했다. 아. 미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폰에서 잠깐 얼굴을 떼고는 다시 붙였다. 우당탕탕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다친데 없어. 나 집에 없을 때 일어난 일이야. 답을 하고는 영중이 먼저 말을 걸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아, 큼, 흠흠...그 언제쯤 올건데? 재워주는건 괜찮은데 집이 좀 지저분해서..."

"지저분한건 신경 안 써. 지금 출발할건데 괜찮아?"

"응. 괜찮아. 주소 문자로 보내둘게. 집에 밥 없는데, 올 때 저녁거리 좀 사올수 있어? 내가 돈 보내줄게."

"됐어. 그냥 근처 가게에서 아무거나 사갈게. 재워주는데 밥은 내가 사야지."

 

 끊을게. 전화를 끊고는 다시 다 무너져내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인 것은 거실 천장만 폭삭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거실에 둔 중요한 물건은 딱히 없었기에 깨진 유리조각을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있어서 콘크리트가 부서지며 생긴 조각덩어리는 문 바닥에만 조금 내려앉아있었다. 큰 짐 가방을 꺼내 옷을 되는대로 쑤셔넣었다. 여벌의 트레이닝복과 암슬리브를 욱여넣자 몇 개 넣지 않은 것 같은데 가방이 터질 것 같았다. 정말 필요한 몇 개의 것만 챙기고는 칫솔이랑 속옷은 근처 편의점에서 사서 들어가야겠다. 지퍼를 겨우 잠그고는 방을 나섰다. 아...세 달 동안 겨우 적응했는데...일단 집주인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만 영중의 집에서 머무르기로 생각했다. 

 영중의 집은 지하철역에서 꽤 가까웠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몇 분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바로 나왔다. 영중이 평소에 잘 먹는 곱창 10인분을 포장해서는 영중의 집으로 향했다. 방 비는 곳 있으면 나도 근처에서 살까. 준향대에서는 좀 멀지만 역이 코 앞에 있다는 것은 꽤 좋은 메리트인 것 같았다. 

 

 건물도 깨끗했다. 신축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낡고 더러운 세월의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전영중은 예전부터 꽤나 깔끔을 떨었으니까. 신축이라고 걔가 나 사는 곳에 들어왔으면 큰일 났겠네. 안 와서 다행이다. 처음에는. 왜 내가 이런 억까를 당해야하는지 억울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자마자 차라리 제가 안 다친 채로 끝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제가 아닌 제 가족이나, 아님...전영중이라거나. 다른 이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져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으. 몸을 작게 떨며 불길한 생각을 떨쳐냈다.

 

 띵동, 영중이 알려준대로 403호로 올라오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작게 쿠당탕 소리가 들렸다. 대체 뭔 짓을 하고 있었길래... 그런 생각이 들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중이 문을 벌컥 열며 저를 맞아주었다. 

 

"왔어?"

"어. 이거 니가 좋아하는거. 내일 연습 있어? 없으면 조금만 마시자."

"내일 없어. 주말이잖아. 그래서. 무슨 일이야? 다짜고짜 천장이 무너졌다길래 놀랐잖아."

 

 부스럭거리는 검은 비닐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뒀다. 영중의 자취방은 처음인데.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딱, 전영중 같이 꾸며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목으로 맞춰놓은 가구에 깔끔한 침구까지. 영중이 골랐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마 전영중 성격이라면 자기가 골랐을 성 싶었다. 어쩐지 영중의 본가를 떠올리게 했다. 어렸을 때는 많이 갔었는데. 17살까지도 자주만 놀러 갔었다. 전학을 간 이후로는 갈 일이 없게 되었지만.

 

 "하...시발. 존나 많은 일이 있었지..."

"가방 이리 줘. 이 쪽에 둘게."

"어어 고맙다...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연락할 사람이 너 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래?"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인다. 내심 심심했던 것인지 제가 오자마자 들떠보이는 영중의 기분이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아님 내가 아니라 음식을 반기는건가. 그럼 조금 괘씸한데. 서둘러 음식을 꺼내고 테이블을 세팅했다. 맥주까지 딱 까고난 후에야 오늘 일어난 일을 영중에게 말할 수 있었다.

 

"별 거는 아니었고. 그냥...갑자기 천장이 무너져내렸어. 그게 다야."

"갑자기? 뭐 금갔다거나 그런 것도 없었고?"

"응...뭐 부실공사였나봐. 시발. 별 일이 다 생긴다 진짜."

"다친데 없는 거 맞아? 확실해? 내일이라도 병원 가볼래?"

"안 다쳤다니까...이 새끼 이거 자꾸 다쳤냐고 묻네? 넌 내가 다쳤으면 좋겠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준수 몸 안 그래도 비실비실한데 다쳤을까봐 걱정하는거잖아 지금?"

"뭐 비실비실? 야 장난해? 네 눈에는 188 농구선수가 비실비실해보이냐?"

 

 손에 들고 있던 캔에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쾅!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손에 힘을 조금 주자 단숨에 캔이 우그러졌다. 술이 약한건지, 영중은 몇 번 마시지도 않았는데 얼굴부터 귀끝까지 잔뜩 벌게져있었다. 그 와중에도 어디 다친덴 없는가 하며 저를 걱정하는 것인지 짙은 양 눈썹이 여덟 팔 자로 휘어져 있었다. 걱정하는건 알겠는데 안 다쳤다니까...자꾸 그러네. 걱정이 한가득 담긴 그 시선이 어쩐지 견디기 힘들어 눈을 피하고 말았다. 취기가 오르는 것인지 귀 끝이 뜨거워졌다. 

 

 나는...준수 네가 많이 다쳤을까봐아...그게 걱정되어서어...

 

 영중의 손이 제게로 뻗어져왔다. 말끝이 점점 흐려진다. 많이 취했나봐. 그러니까 나 말고 네가...따끈한 손이 귀를 슬쩍 만진다. 눈이 감겼다. 오늘 하루종일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이제야 긴장이 풀리고 졸음이 밀려온다. 고개가 영중의 손을 향해 조금씩 넘어갔다. 아 따끈해. 손바닥이 볼에 닿기 직전이었다. 감기려는 눈을 살짝 뜨고 영중을 바라보았다. 고개가 앞으로 쏟아졌다. 쿵. 동글동글한 머리만이 보였다. 엥...? 방금까지만 해도 무겁던 눈꺼풀이 순식간에 크게 떠졌다. 끔뻑이자 엎드려서 자고 있는 전영중만이 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빈 캔은 어느새 중심을 잃고 넘어가 식탁 위를 구르고 있었다. 허. 이게 대체 무슨. 어이가 없어서 잠이 깨버렸다. 

 

 무드도 모르는 새끼... 

 

 픽, 웃음이 터졌다. 색색-. 안정적인 숨소리를 내뱉으며 잠에 든 영중을 끌고 침대에 눕혔다. 식탁과 침대의 거리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폭신한 매트리스 위로 장정 두 명이 넘어갔다. 커봤자 퀸 사이즈 침대 쓸까 싶었는데 혼자 살면서 칼킹을 쓴다. 이 새끼 여자 있는거 아냐?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아직 전영중한테 여친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맥주 한 캔 마시고 취해서 뻗는 새끼가 여기 있네... 잔뜩 취해 벌게진 채로 잠을 자는 영중의 얼굴을 찬찬히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벌써 스무살인데. 아직도 볼이 말랑말랑... 볼을 콕콕 찌르던 손가락이 턱선을 타고 내려왔다. 꼴에 턱선은 또 날렵했다. 그 밑으로 만지작거리니 툭 튀어나온 목젖이 만져졌다. 어색하다 이런거. 내가 아는 전영중은 울보지만 또 바보같이 웃으면서도 공 던지는 소년이었는데. 낯선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내가 아는 전영중이 아닌 것 같아. 너도 그래? 너도 내가 네가 아는 성준수가 아닌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자 고등학생 때 경기에서 만나기만 하면은 제게 시비를 늘어놓으며 속을 박박 긁던 영중의 모습이 이해가 갔다. 어깃장을 두고 싶은 것 뿐이다. 내가 아는 성준수는 이게 아닌데. 그러니까 네가 아니라 내가 맞아. 내가 아는 성준수만이 정답이야. 그런거... 너 같이 속 꼬이고 복잡한 놈이라면 충분히 해봤을 생각이니까. 

아니면...말고. 

 

 네가 나를 다 아는게 아닌 것처럼 나도 너를 다 모를 수 있으니까. 그냥 내가 어느 순간 갑자기 확 열받게 만들어서 그 지랄을 한 걸 수도 있으니까...복잡하다 정말. 넌 참 풀기 어려운 문제같아.

야. 바보야. 내가 뭔 잘못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는 마. 

왜냐면, 나는...

 

 

전영중의 이야기

 집주인과 연락이 닿아 몇 번 문자를 하던 성준수는 결국에 폭발해버려 핸드폰을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고는 말았다. 본인이 해외에 있기에 지금 입국을 할 수 없다는 말의 되풀이였다. 그러니 준수가 업체를 부르겠다고 해도 세입자가 제 건물을 건드리는 것은 또 안된다며 억지를 부려댔다. 상황을 알고나니 성준수가 겨우 핸드폰 던지는 것으로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는 것이 조금은 의외였고 대견해보이기까지 했다.

 시작부터 집주인과 대판 싸웠기 때문인지, 솔직히 화가 많이 난 성준수와의 동거는 삐걱거릴 줄 알았으나 의외로 별 일 없이 순조로웠다. (그렇다고 안 싸우는 건 아니지만. 어제도 싸웠다. 사유는 노코멘트.) 같은 운동선수라고 생활 패턴도 비슷하고 먹는 양도 비슷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린 집으로 돌아간 준수는 남은 짐을 싸그리 챙겨 저의 집으로 왔다. 며칠만 신세질 것 같던 동거도 어느덧 저만의 공간에 성준수의 영역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동거를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난 시점이었다. 학교가 조금 더 멀어진 준수에 원래 7시에 일어나던 제가 준수에 맞춰 6시 반에 일어나기는 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잘 다녀오라며 먼저 급하게 나가는 성준수를 보내고는 저도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리가 되지 않은 침구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 잘 때 잘 움직이지 않는 편이어서 그런지 침구가 흐트러진 적이 적었지만 성준수랑 함께 자고부터는 아침만 되면 이불은 반쯤 뒤집어져 있고 베개는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준수 또 이리저리 몸 뒤집으면서 잤나 보네...고등학생때도 그러더니. 아직도 그런가.

 

 문득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기숙사 침대에서도 몸을 조금만 욱여넣으면 서로를 껴안은 채 잠에 들 수 있었다. 지금은, 어쩐지 한 침대에 눕는 것이 어색하고... 또 조금은 낯간지러워 손끝 닿기도 어려웠다. 그때는, 준수가 몸을 뒤틀면서 잠에 들면은 그런 준수를 똑바로 눕히고는 어깨를 토닥여주며 자장자장, 마치 애기 취급하듯이 재웠었다. 수마에 빠져있던 성준수는 전혀 알지 못하겠지만, 저만이 간직하고 있는 반 년의 기억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때에 냉장고에 붙여져있는 파란색 포스트잇이 눈에 띄었다. 이게 뭐지 싶어 신으려던 신발을 벗고는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휘갈겨 쓴 낯익은 글씨체. 성준수가 남기고 간 쪽지였다.

 

[ 야. 너 오늘 서교대랑 경기있지. 

지고 오면 뒤진다. 

끝나면 연락해. 컨디션 괜찮으면 외식이나 하고 들어오자. ]

 

 풉.

"큭, 하하하! 아, 성준수 진짜 뭐지. 누가 응원을 이런 식으로 하래?"

 

 아, 웃겨. 눈물날 것 같아. 꺽꺽대며 숨 넘어갈듯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 대체 언제 남기고 간 거야. 지고 오면 뒤진다, 라는게 성준수의 목소리로 들렸다. 이게 다 성준수식 응원같아서.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파란색 포스트잇을 냉장고에서 떼어내 고이 두 번 접었다. 제 가방 앞주머니에 잘 넣어두고는 그 곳을 툭툭, 두어번 쳤다. 마치 이게 부적이라도 되는 양...성준수의 슛감을 빌려오는 기분이었다.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디펜스에만 공략하지 않고 야투율을 조금씩이나마 늘리는 것도 집중 연습을 했기 때문에. 이번 경기에서 그 연습이 빛을 발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내심 있었다. 성준수의 운을 빌려오니 어쩐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성준수다운 생각이 들었다. 웃음이 내내 입꼬리에서 넘실대며 머물렀다. 경기가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긴장감이 저를 짓눌러왔는데, 오늘은 발걸음부터가 달랐다. 

 가벼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아, 나 이런 생각 정말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성준수를 닮아가나봐. 근데...이 기분이 나쁘지 않아. 어쩌면 조금은 좋은 것도 같아. 

 학교로 가는 내내 가방 속 파란 쪽지가 들어있는 앞주머니를 몇 번이고 매만졌다. 그러면 성준수의 응원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이들의 응원보다 배로는 행복했고 기운이 나는 것만 같았다.

 

* * * 

 

[ 준수야. 나 방금 끝났어. 어디야? 내가 갈게.] 

[ ㄱ. 준수 : 체육관 앞이야. 빨리 씻고 나와. 이긴 건 잘했다. ]

 준수의 문자에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경기 보러 왔구나. 오늘 수업 일찍 끝났나? 몇 시에 한다고 말도 안해줬는데. 잘만 찾아서 온 듯 싶었다. 잘 기다리고 있으라는 답장을 보내자 알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서둘러 씻고는 급하게 락커룸을 나갔다. 영중아! 어디가냐? 라는 동기의 질문에 약속이 있다며 대강 답하고는 체육관을 가로질러 뛰었다. 문 코앞에는 성준수가 있었다. 제가 보낸 잘 기다리고 있으라는 그 말에 응하기라도 하듯 성준수는 체육관 문 앞에 서서 저를 기다렸다. 주변에서 힐끔대는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라도 한 지 괜히 시선을 위로 돌려 사람들과 시선을 마추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에 문을 열고 나서려 했다. 그때였다. 준수를 향해 직진하는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을 보고 있다 갑자기 고개를 올린 준수가 다가오는 여성을 피하기란 어려웠다.

 

"저기, 아까부터 누구 기다리는 것 같던데..."

"아, 네." 

"다름이 아니라...제가, 실례가 안된다면 인스타 아이디 좀 알 수 있을까요?"

"네? 아...그게."

 

 지금 이게 무슨... 성준수 인스타 안하잖아. 아니, 잠깐만. 제가 저번에 만들어 준 계정이 하나 있었다. 주변 애들 소식 좀 듣고 살으라며 하나 만들어뒀더니 저만을 팔로우해두고는 만 계정이었다. 그러니까 성준수 계정의 유일한 팔로잉, 팔로워가 저인 그 계정을. 설마 저 선배한테 알려주려는건 아니겠지? 

 그건, 그건 너무하잖아. 그건... 머뭇거리는 성준수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문을 박차고는 뛰쳐 나갔다.

 

"죄송해요. 선배. 이 친구 오래 사귄 여자친구도 있구, 인스타도 안해서요. 먼저 가볼게요, 선배!" 

 

 손목에 걸친 채 돌리고 있던 볼캡을 준수의 머리 위에 팍, 씌워주고는 어깨에 두터운 손을 올리고는 마치 랩이라도 하듯 속사포를 뱉어내고는 도망쳤다. 야, 야! 전영중! 어디가는데! 준수가 화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저 선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준수를 밀며 달려나갔다. 

 

"야! 전영중! 멈춰, 멈추라고!"

"...아!"

"장난해? 뭐하냐?"

"준수야말로 뭐 해? 나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지. 우리 학교 학생한테 꼬리치라고 한 적은 없는데?"

"이, 씹. 말 똑바로 해라, 내가 먼저 아이디 딴 줄 알겠다. 니도 봐서 알잖아? 음침한 새끼. 어디서부터 지켜봤냐? 어?"

"허.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거든? 평소에는 잘만 잘라내면서 완전 선수야? 빨리 거절 안하고 뭐했냐? 그 선배가 마음에 들었어? 입술이 아주 바짝바짝 마르던데? 

"너 질투하냐? 왜 이렇게 지랄이지?"

 

 질투. 

 그 한 마디에 턱, 하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질, 질, 질투라니! 내가 무슨 질투야? 누가 들으면 내가 준수 너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어? 그건, 말이 안되잖아. 나는...너랑 소꿉친구고. 또, 일단 우리는 남자고. 여튼 내가 널 좋아하는건 말이 안되는거잖아? 무슨, 그런 소리를 다 하고 있어. 

 볼이 화악, 붉어졌다. 경기의 흥분감이 채 가라앉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쩐지 뜨거운 볼을 손을 들어 가리려 애썼다. 이제 슬슬 저녁이니까, 이렇게 하면... 성준수 눈에 안 보이지 않을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네가 오해 할까봐 그렇지...지금도 봐, 내가 지금 질투따위를 하고 있다는 헛소리나 내뱉고 말이야... 애초에 준수 네가 딱 잘라냈으면 내가 이렇게 말할 일도 없는 문제잖아. 그러니까,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 네 문제야.

 

"입에 꿀이라도 발랐나. 왜 말을 안 해. 뭐하냐니까? 번호를 주든 아이디를 주든 내 마음이지. 안 그러냐?"

"뭐? 번호까지 주려고 했어? 준수야 너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번호를 함부로 주려고 그래? 그거 다 개인정보인거 몰라?"

"아 시발 이 새끼 또 시작이네. 어째 잠잠하다 했다? 뭐가 또 불만인데? 저 선배가 네 짝녀라도 돼?"

"..아니야. 그런거."

"야, 야. 솔직하게 말해봐. 너 저 선배 좋아하지?"

 

 순간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입술이 절로 삐죽이며 튀어나오는 것도 같았다. 그런거 아니라고. 나 저 선배 안 좋아해. 누군지도 잘 몰라.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거 아니거든."

"..."

"진짜야."

"...뭐. 네가 아니라면 됐고."

 

 한참을 목 터져라 싸우니 힘에 부쳤다. 혈기왕성한 스무살이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간과하는 것은 상대도 혈기왕성한 스무살이라는 것이다. 누구 하나 지칠때까지 싸우려면 서로의 체력을 조각조각 깎아 먹어야만 했다. 출전시간은 짧았어도 열심히 경기 뛰고 온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화 낼 일이야? 

 

"...오늘 슛 넣은 건 잘했더라. 팔 힘 조금만 더 기르면, 안정적으로 삼점슛 넣는 것도 가능할 것 같던데. 다음엔, 좀 더 잘 해보든가..."

 

 뜬금없는 칭찬이 건네져왔다. 아. 이건, 성준수식의 화해요청이었다. 상황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대뜸 오늘 한 경기를 칭찬해준다. 얘는 고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더 멀리 가 초등학생때도. 한결같이 그랬다. 작게 웃음이 터졌다. 성준수가 먼저 한 발 물러났으니. 그 요청에 응해야 할 때였다. 

 

"준수. 나 배고파. 밥 사준다며. 빨리 가자."

"뭐래? 내가 언제 사준다고 했냐? 같이 외식하자고 했지." 

"허? 준수 양심없다? 아침마다 내가 해주는 밥 먹고 가면서? 나 오늘 경기도 이겼는데?"

"알았어, 알았다고. 쫑알쫑알.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

 

 우리 뭐 먹으러 가? 네가 골라. 음 그럼 나는... 준수가 쓰고 있던 볼캡을 답답하다는 듯 벗으려 들자 안된다며 도로 씌웠다. 또 아이디 따이면 어떡해? 내 눈 앞에서? 그 꼴을 두 번 보는 건 사양이었다. 제 뜻을 알아들은건지 아니면 그냥 포기한 것인지. 준수는 말없이 모자를 계속 쓰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갈때까지도. 그리고 밥을 다 먹고 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저의 모자를 쓴 채였다. 

 

"어. 농구코트네."

"아. 맞아. 공원에 있더라고. 한 달 동안 몰랐어?"

"이 쪽 길로는 안 다녀서."

 

 야. 전영중. 

 

 갑자기 멈춰선 준수가 저를 불러세웠다. 왜? 등을 돌리자 준수가 저 바닥에 굴러다니던 낡은 농구공을 주워 쌓인 흙먼지를 털어냈다. 야. 영중아. 한 판 안 할래? 성준수가 웃으며 물었다. 농구에 미친놈. 농구공만 봐도 아주 그냥 눈이 돌아가지? 방금 밥 먹고 온 건 기억도 안 나나봐.

 

"준수 요즘 빠졌네? 이런 곳에서 농구하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야, 야. 영중아. 혀가 길다? 쫄려?"

"한 판 떠."

 

 성준수의 쫄? 한 마디에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원래 이런 도발은 웃으면서 넘기는 편인데. 이상하게 성준수의 말에만 자꾸 작용이 일어났다. 다치지 않게끔 몸을 풀고는 신발끈을 고쳐 묶었다. 어깨에 들쳐 매었던 가방은 저 구석으로 내동댕이치고는 공을 퉁, 퉁. 튕겨보았다. 바람이 조금 빠져있지만 나쁘진 않았다. 

 

"먼저 10점 낸 사람이 이기는 걸로. 제한 시간 10분. 어때?"

"콜. 진 사람이 뭐할래?"

"아이스크림 사."

"새끼. 그새 출출하냐?"

"먼저 도발한 건 너거든?"

 

 휴대폰으로 십 분 타이머를 맞춰놓고는 시작했다. 먼저 공을 잡은 것은 성준수였고. 그대로 점프. 팔을 뻗자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안정적으로 그물을 스치고는 떨어졌다. 실실 웃는 준수에 속이 꼬여 떨어지는 공을 잡아내고는 두어번 튕기고는 준수와 눈을 마주쳤다.

 

"고작 한 번 넣어놓고 기분이 많이 좋아보인다?'

"경기를 할땐..."

 

 집중해야지. 새끼야. 살살 도발을 걸려던 때였는데 제 손에서 공을 스틸해가는 준수에 의해 막혀버렸다. 뒤로 발을 몇 걸음 빼더니, 또 다시 그대로 3점. 이번에도 공은 잘만 들어갔다. 길거리 농구라고 달라질리가 없었지. 삼점슛 머신 마냥 세 번이나 연달아서는 삼 점을 쑤셔넣었다. 내기까지는 단 한 점 남은 상황이었다. 

 

"야, 후달려? 내가 이기겠는데?"

"뭐래, 준수야. 경기는 끝까지 보는 거거든?"

 

 이번엔 제가 빨랐다. 공을 튕겨내며 골대를 향해 달려갔다. 공을 손에 쥔 채로 높게 점프해 덩크슛을 성공시켰다. 됐다! 만약, 성준수 앞에서 실패했으면 쪽팔릴 뻔 했을지도 몰라. 기뻤던 마음 탓일까. 착지가 꼬였다. 내려오기까지는 성공했으나 뒤로 물러나는 때에 스텝이 꼬여버렸다. 그대로 뒤에 있던 준수와 부딪혀서는, 쿵!

 

 말캉. 

 

 말, 뭔? 말캉? 이게 대체 무슨...

이마와 이마가 충돌했고, 코끼리 비벼졌으며, 그대로 두 입술이 서로 포개졌다. 3초간의 정적이 생겼던 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는 뇌가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말랑해. 성준수같지 않아. 부드럽고, 그리고...

 

"야...이...씨발.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

 

 헉. 황급히 입술을 떼고는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을 때 욱신거리는 곳이 없는걸로 보아 다치지는 않은 듯 했다. 근데 지금은. 다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슬쩍 눈동자를 굴려 성준수 쪽을 바라보자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표정이 잘 안 보이는데. 화 났겠지? 화 났을 것 같아... 그치만 이건 사고였고. 나도 첫 키스를 너한테 뺴앗긴게 됐는걸. 너만 억울할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

 

"이...씹..."

"주, 준수야..."

 

 그때였다. 저 땅바닥을 구르고 있던 공을 주운 준수가 그대로 깔끔하게 레이업 슛을 넣었다. 순식간에 펼쳐진 일에 어이가 없어서는 입이 딱 벌어졌다. 준수 미쳤어?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내기가 더 중요한거야? 

 

 "내가 이겼다? 올 때 아이스크림 사와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양 주머니에 손을 팍 꽂아넣고는 저벅저벅,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에 어딘지 화가 솟구쳤다. 너는 어떻게 그래? 너 지금 10년지기 소꿉친구랑 키스했다니까? 입술이 막 부벼졌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성준수 문란해. 최악이야 진짜! 

 

 쿵, 쿵! 집으로 오는 내내 일부러 발걸음을 크게 냈다. 집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 않게 옷을 훌렁훌렁 벗으며 갈아입는 준수에 기함하며 방문을 쿵! 부서질 정도로 세게 닫았다. 너는 왜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나만 그런거야? 내가 정상이야. 보통은, 친구랑 키, 키스를 하면 어색해지는게 당연하고, 그 사람을 의식하는게 당연한건데. 어떻게 너는 나를 보자마자 아이스크림을 찾을 수 있어? 진짜 알 수가 없다 준수야. 어쩜 이리 천하태평해? 가끔은 그런 네가 너무 부럽다. 너는 진짜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단순하면서도 어렵지? 마치 절대로 풀 수 없는 문제 같아. 아마 내가 너를 맞출 일은 평생 없을 거야. 

 성준수 너가 너무한거야. 네가, 나랑 다른 사람이고,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러니까, 나는...

 

성준수의 이야기

 전영중과의 사고가 일어난 것도 이제 벌써 2주나 지난 일이 되었다. 동거를 시작하게 된 지는 한 달 반. 집주인은 이주에 한 번씩 연락을 줬다. 연락이라기보다는 제 허락없이 함부러 업체를 부를 경우 고소를 하겠다는 둥, 엄벌에 처하겠다는 둥에 경고성 메세지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물론 그딴 문자에 한 번도 쫄은 적은 없지만, 괜히 쓸데없는 일에 휘말릴까 싶어 귀찮아지는 것은 딱 질색이라는 마음에 결국 한 달을 더 영중의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사고 당일, 영중은 화라도 난 사람 마냥 하루종일을 툴툴대길래. 심지어 잘 때까지 그러길래 작작하라는 소리에 조금은 잠잠해졌지만. 확실히 이 새끼가 삐진 것은 알 것 같았다. 너만 첫 키스냐? 나도 첫키스거든? 지만 억울하지 아주. 사실 첫키스 뭐 그런거 나한테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남들은 첫 키스를 하면 머리에서 종이 울려퍼지고 달콤한 솜사탕 속에 파묻힌 것 같다던데. 저의 첫키스에 대한 감상은 의외로 까슬하네. 였다. 볼이 말랑말랑하길래 입술까지 말랑말랑 할 줄 알았다. 이것은 전영중에 대해 처음 알게된 사실이었다.

 전영중은 어땠을까. 걔도 나랑 비슷했으려나. 솔직히 그런것도 없었을 것 같아. 처음부터, 걔는 짜증을 먼저 냈잖아. 영중이 삐진 티를 너무 내길래. 걔가 내는 만큼 저도 그 정도의 싫은 티는 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지만 수지타산이 맞는 거잖아. 나만, 이런 처음의 감상이 남아버리면 안되는거잖아. 그건 억울하니까.

 

 일주일씩이나, 제가 침대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움찔거리는 영중에 잠 못 이룬 지 일주일 쯤이 지나고는 다시 관계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서로 시비를 걸고, 장난을 치고. 아침을 함께 먹고, 같이 등교를 하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그 사이가 되었다. 2주 전에 있었던 일은 오히려 거짓말 같았다. 지금이 너무 평안해서.

 

"준수야, 나 오늘 늦어."

"왜?"

"왜는 무슨 왜야, 오늘 미팅있어."

"미팅?"

"어, 동기가 졸라가지고...나도 잘 모르겠다. 나 먼저 갈게. 오늘은 먼저 자."

 

 도어락이 쿵, 하고 닫혔다.

 미팅? 

 미팅이라고?

 그래 전영중이랑 이렇게 평화가 지속될리가 없었지. 이번엔 제가 이 판을 엎어야 할 때였다. 미팅이라니, 나랑 키스해놓고는 여자를 만나러 간다고? 전영중 미쳤어? 속에서부터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질투? 아니 이건 질투같은 치졸한 감정이 아니다. 그냥 존나 괘씸한거다. 그렇잖아. 2주 전에 나랑 실수로 입술 조금 부볐다고 그렇게 지랄하던 새끼가 여자 처 만나러 간다고 하는게.

 

"야 있잖아. 나 성준수인데. 오늘 전영중 미팅 혹시 어디서 하는지 알아?" 

 

 전영중 인간관계야 뭐 거기서 거기지. 애가 유하고 너그로워서 발이 넓은 것 같아도 제 그라운드에 두고 있는 건 몇 안된다는 것을 안다. 원중고를 3년 내내 함께 다니고 지금은 같이 주익대에서 뛰고 있는 지국민이라면 알겠지. 아니 얘가 주선자면 개빡칠 것 같긴 하다. 여미새 짓은 너 혼자 하라고. 엄한 애 붙들지 말고 말이야.

 지국민한테 전화를 걸자 술술 불어댔다. 어 오늘 6시에 학교 뒤의 투썸에서 만나? 이건 왜 묻냐고? 아, 별건 아니고. 전영중이 지갑을 두고 갔길래. 어 그래 고맙다. 어. 지국민이 술술 불어대듯 저도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어 전영중 너 아주 죽었어 그냥. 시간이 흘러 오후 다섯 시가 되었고, 평소에 절대 입지 않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남친룩으로 갈아입고는 집을 나섰다. 괘씸한 놈의 데이트를 방해할 시간이었다.

 

 * * *

 

"아 그럼, 영중이라고 불러도 돼?"

"아. 응. 편한대로 불러."

 

 웩, 편한대로 부르라니. 목소리에 꿀 발랐나. 왜 저렇게 간드러지게 말해?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여자애가 뭐라고 네가 그렇게까지 하는데? 나는 네가 그렇게 목소리 내는 거 처음 들어보는데. 말투는 왜 이렇게 부드럽고? 너 나한테 그렇게 말한 적 한 번이라도 있었냐. 갑자기 짜증이 확 나네. 사실, 전영중이 예의 차리는거 저 아닌 다른 애들한테 다 그런다는거 알고 있었지만 눈 앞에서 저러니까 어쩐지 뱃 속이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뒷자리에서 남의 대화 훔쳐듣는 것도 영 사람 할 짓이 못 됐다. 

 

"아, 괜찮으면 전화번호 줄래? 종종 연락하자. 나는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

"그래. 폰 줘봐. 내가 찍어줄게."

 

 뭐? 

 전화번호를 준다고. 이 새끼가 지금 나랑 뭐하자는거지? 인스타 아이디 넘긴다고 지랄하던 놈은 어디가고 지금 지 개인정보를 술술 넘기고 있는거야?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더 말하자면. 이것은 질투같은 치졸한 감정이 아니다. 괘씸한 새끼 혼내주러 가는 것 뿐이었다. 

 

"야. 영중아. 집에 안 들어오고 지금 뭐하냐?"

"...성준수?"

"누구...?"

"아, 내 친구인데, 어. 조금만 기다려줄래? 친구랑 잠깐만 얘기 좀 하고 올게."

"그래. 다녀와."

 

 상대의 허락을 받은 영중은 곧장 제 팔을 끌고는 카페를 나섰다. 깊숙한 골목 안쪽까지 들어와서는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야 만다. 뭐야. 지금. 왜 지가 인상을 써? 지금 지 미팅 방해했다고 나한테 성질 부리는거야? 어이가 없었다. 

 

"준수야. 이게 지금 뭐하는거야? 나 오늘 미팅 있다고, 늦는다고 말 했잖아. 아니, 그보다 장소는 어떻게 알고..."

"지국민이 술술 불던데? 야, 걔가 주선자냐? 상대가 니가 맘에 든대? 그래서 다리 놔준거고? 안되겠네 지국민."

"뭔 소리야 진짜. 그만 돌아가. 오늘은 저 친구랑 선약이었던거잖아. 네가 방해하고 그러면 저 친구 난처해서 어떡해. 방금도 당황하던데, 진짜. 참. 준수는 배려심이라는게 없어..."

"야. 너는... 지금, 걔가 더 중요하냐? 오늘 처음 본 그 애가?"

 

 영중이 제 말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놀란건지 아님 의외라고 생각한건지. 저도 잘 모르겠으나. 한 번 북받친 감정은 쉴 새도 없이 흘러나왔다.

 

"너는. 나한테 저번에 인스타 아이디 넘긴다고 생트집 잡으면서 지랄을 하더니 오늘은 아주 그냥 개인정보고 뭐고 아주 술술 넘기네? 내가 하면 불륜이고 니가 하면 로맨스야?"

"걔가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다잖아. 준수야 까고 말하면 너는 미팅 안했어? 솔직히 미팅 그거 그냥 친구 사귀려고 나가는거 다 알잖아. 왜 이런 걸로 난리를 치지? 됐다. 왜 내가 이런거까지 해명하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됐어? 난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그리고, 너는, 하... 나랑 키스 해놓고는 2주 만에 여자 만나러 가는게 말이 되냐? 나한테는 최악이라는 둥 문란하다는 둥 별 소리를 다 하더니? 그럼 뒤에서는 남자랑 입술 부비고 앞에서는 여자 만나러 가는 네가 더 문란한 거 아니냐?!"

"...나 좀 헷갈리는데. 설마. 준수 너, 좋아하고...막 그러는 거 아니지?"

"뭐래? 난 너같이 앞뒤 다르고 문란한 새끼같은건 안 좋아하거든?"

"...다행이네. 난 또 준수가 무슨 입맞춤 한 번에 지조나 절개같은거 지키는 수절남인 줄 알았잖아. 요즘 세상에 누가 키스 한 번 했다고 사귀고 그래. 그리고 그건 솔직히. 사고였잖아? 애초에 입술만 조금 스친건데, 키스라고 부르는 것도 웃기긴 하지? 안 그래?"

 

 다행이네. 

 그 말 한 마디가 거슬렸다. 너 왜 시발, 사람을...그딴 식으로 말해? 다행이라고? 너한테는 다행인 일이야? 나는 방금...심장이 떨어졌는데. 괘씸한 새끼. 야비한 놈. 

 저를 벽으로 밀어붙인 영중에게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영중이 뭐하는 짓이냐며 눈썹을 찌푸리자 아랑곳 않고는 그대로 벽에 팔을 기댔다. 완전히 제 안에 갇힌 모양새였다. 눈을 슬며시 감았다. 얼굴을 살짝 비틀고는. 그대로

 

 입술을 붙였다.

 영중이 흠칫 놀라기라도 한듯 몸을 움찔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대로 열린 입술 안으로 혀를 밀고 들어갔다. 안을 파고 들어서는 깊이, 조금 더 깊이, 혀를 쑤셔 박았다. 키스하는 방법 따위 알지 못했다. 혀를 얽고는 비비적거리다가 고개가 살짝 틀어져서는 영중이 제 허리에 팔을 감는 것이 느껴졌다. 더운 숨이 섞였고, 그대로 혀를 맞붙였다 떼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아무도 없는 외진 골목길에서는 한껏 쪽쪽거리며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외설적인 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혀가, 아쉽다는 듯 떨어졌을 땐 서로의 호흡이 부족해졌을 때였다. 아쉽다는 듯 멀어지는 입술을 좇던 영중이 멈춰서자 잔뜩 눈이 풀린 채로 저를 보채는 시선을 보내는 영중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안달나 보이고 부족해보였다. 엿이나 먹으라지.

 

"쌤통이다, 멍청아." 

 

 바보같이 서 있는 영중에 코를 찡긋거리며 한 번 웃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서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얼빵한 표정으로 허망하게 서 있는 영중의 꼴이 꽤 웃겼다. 하, 하하! 터져나오는 웃음에 거리의 사람들이 저를 보고 수근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영중에게 빅엿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으니까! 문제를 풀 수 없으면 제 방식대로 부숴버리면 되는건데 너무 먼 길을 돌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영중의 이야기

 성준수는 미친거야. 미친게 틀림없어. 정상인이라면 절대 이런 짓 못하지. 안 그래? 어떻게 거기서 그렇게 키, 키, 키스를 하고 튈 수가 있어? 이번에는 혀까지... 섞였던 진짜 키스였다. 부드러웠지. 성준수 입술...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잃고는 성준수 허리에 손을 감았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걸. 

제 입술을 매만지며 얼마전에 성준수에게 빼았겼던 진짜 첫키스를 복기해보았다. 그,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건가? 솔직히 그 정도로 진하게 혀를 섞었으면은... 사귀는게 맞지 않나...? 준수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저는 지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거기서 그런 말을 하는게 아니었는데... 머리를 싸매고는 언성 높여가며 싸울때의 발언을 후회했다. 나 성준수한테 뭐라고 말 해? 사귀는거 맞냐고? 그랬다가 내가 그때 했던 말이 돌아오면 어떡해? 근데, 진짜 이거는 솔직히 사귀는게 맞는거잖아. 성준수 너는 친구랑 그렇게까지 찐한 키스를 해? 존나 열린 마인드네? 좋겠다. 나는 아주 꽉 닫힌 유교남이라서. 그런거 절대 용납 못하는데. 

 

 시계를 보니 8시였다. 조금 있으면 준수 돌아올 시간인데. 얼굴을 어떻게 보지 진짜... 그때의 진짜 키스 이후로 얼굴을 마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냥,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막상 얼굴을 보면 뭐라고 말해? 만약에 걔가 안사귄다거나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제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튀어나올까 싶어 겁이 났다. 그래서 준수가 집에만 있으면 부리나케 약속있는 척을 하며 밖으로 도망을 나갔다. 그러기를 한 2주쯤 반복했나. 슬슬 준수가 빡쳐서 다 엎어버릴 성 싶었다. 이렇게 사는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멍청아. 뭐하고 서 있냐."

"주, 주, 준수 왔어?"

"등신...오늘은 용케 안 도망쳤네? 

"도망, 은 무슨. 내가 언제 도망을 쳤다고..."

 

 멍 때리고 있던 어느 순간에 성준수가 집으로 돌아왔다. 은근히 저를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제가 평소에 도망치는 것을 벼르고 있던 모양이었나보다. 비척비척 기어 들어온 성준수의 손에는 커다란 봉지가 하나 들려있었다.

 

"이게 뭐야?"

"아. 팝콘. 너 먹고 싶다며. 오늘 집에 있을거야? 영화나 보자."

"그걸...기억했네. 지나가는 말로 한건데."

"글쎄...그냥 생각이 나더라고."

 

 뭐야? 그거 무슨 의미야? 뒤를 돌아 성준수를 부르려 했지만 씻겠다며 이미 욕실로 들어간 후였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가슴에 손을 얹고는 가만히 뛰는 심장을 지그시 눌러보았다. 두근? 아니 이건, 쿵, 쿵, 쿵, 쿵, 쿵....일정하지만 조금 빠른 속도로 뛰는 심박수였다. 농구를 할 때와는 다른 속도였다. 차분하면서도 속도감이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거. 그러니까, 이게... 

 

"야. 나 다 씻었어. 영화 뭐 볼래?"

"...골라놓은거 없어?"

"없는데. 그냥 넷플릭스에서 찾아보자."

 

 준수를 따라 소파 앞에 앉았다. 이불을 깔아 푹신하게 만들자 시트 위에 앉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불을 끄고 암막커튼까지 치니 정말 영화관에 온 것만 같았다. 성준수가 사온 커다란 팝콘 봉지는 제 품 안에 안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준수가 팝콘을 집으러 가까워질때마다 어쩐지 의식하게 되었다. 내 얼굴이 붉어졌을까? 귀 끝이 빨개졌으면 어떡하지. 나 지금 떨고 있지는 않을까? 아 어떡해. 다 바보같잖아...

 

눈에 성준수가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성준수가, 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앞, 에, 봐."

 

 진짜 영화관인 것처럼,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 마냥 작게 속삭이며 입모양을 크게 내며 웃는 성준수에, 전영중은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제가 고른 영화는 고등학생들의 청춘을 담은 영화였다. 녹빛 그림자 지는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하는 두 아이가 행복해보였다. 아이들의 시작부터 헤어짐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제가 다 씁쓸해지는 것도 같았다. 영화는 상, 하 편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상 편에서는 헤어짐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하 편을 틀기 위해 리모컨을 찾으려 들 때였다. 

 

 툭. 

 성준수의 고개가 제 쪽으로 떨어졌다. 어찌할 바도 모른 채 가만히 숨을 죽였다. 새근새근 잘 자는 성준수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요즘은 잘 자네. 한창 잠자리 가릴때만 해도 자고 일어나면 거꾸로 누워있더만. 이제는 이 집에 완전히 적응이라도 했는지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꾸벅, 꾸벅 고개를 움직이며 자는 성준수에 깔아두었던 이불 위로 완전히 눕히고는 방 안에서 이불을 가지고 왔다. 그 위로 덮어주고는 잘 자, 인사를 건넸다. 

 

...

 떠나려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잠시 그 주위를 서성거리다 그대로 옆에 누웠다. 새우잠을 청하듯 몸을 둥그렇게 말고 준수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손을 살짝 뻗어 귀를 만지작거리자 잠꼬대인지 으응, 소리가 작게 들렸다. 부드러운 귓볼부터 시작해서 눈 아래를 슬쩍 엄지로 쓸다가 말랑말랑한 입술을 슬쩍 건드렸다. 이 입술은, 두 번이나 맞춰봤는데도. 마주할 때마다 익숙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충동이 들어. 몸을 조금 더 가까이했다. 얼굴을 뻗자 제가 만져대던 입술이 코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만 고개를 숙였다가는 까딱하다가 입을 맞출 판이었다. 준수야, 넌 참 풀 수 없는 문제같아. 내가 정답인가 싶다가도 아닌 것 같고. 이렇게 말하는게 맞는 것 같은데 네 논리는 또 아니고... 

 풀 수 없는 문제라면, 사실 난 안 풀어버리는 사람이야. 오답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 근데. 나 지금. 살짝, 이상한 용기가 생겨버려서... 오답인 것을 알면서도 문제를 풀어보려고. 

 

 고개가 숙여졌다. 코가 맞닿았고, 작게 쪽, 소리가 일었다. 

 성준수는 모를, 전영중의 답이었다.

 

 

그들의 이야기

 

"전영중."

"어?

"집주인 한국 들어왔대. 오늘 집 좀 보고 올게. 늦을 수도 있어. 저녁 먼저 먹어."

"...어." 

 

 3개월 가까이 지속되던 동거는 슬슬 막을 내리고 있었다. 성준수의 집주인은 한국으로 들어왔고, 곧바로 공사를 해준다고 했다. 물론 그 집으로 돌아가서 살지는 않을거라고 했지만, 어쩄건 성준수가 전영중의 집에서 나간다는 것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전영중은 요즘 어쩐지 우울감에 빠져 살았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우울감을 지녔다. 단지 성준수가 집을 나갔다고해서 우울한 것이 아니었다. 애도 아니고. 그냥...성준수는 3개월동안 고작 저의 집 내부에서 그렇게나 많은 영역을 차지했는데. 그렇다면 성준수가 전영중 인생에서 온전히 차지하는 비율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알 수 없었다. 이미 아는 시간만 해도 10년인데. 그것을 계산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준수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요즘 많이 바쁘다던데. 그렇다고 연락할 용기는 또 없어 묻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종일 성준수의 생각을 하며 날을 보낸 전영중이었다.

 

 성준수는 요즘 한창 바빴다. 이전 집에서 짐을 빼오고 다시 본가로 들어갔다. 새 집을 구하기 전까지만 들어가있기로 했다. 통학시간이 배로는 길어져서 그런지 아침마다 고생한다는 이야기가 주익대에 있는 전 누구씨한테까지 전해질 정도면 하루종일 다크서클을 달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남는 시간은 온통 새 집을 보러 다니는거였으니. 개인시간이랄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너무 피곤해서 지하철에서 깜빡 잠들어버린 적도 일쑤였다. 그럴때일수록 전영중이 자꾸만 생각났다. 얘는 왜 연락도 안하지...나한테 분명히 할 말이 있을텐데. 

그렇게 틈만 나면 전영중의 생각을 하며 날을 보낸 성준수였다.

 

 바쁜 시간을 보내며 학교가 달라 마주할 일이 적어진 서로를 잊어갔고, 어느새 시간은 저들이 동거를 했던 기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6월의 여름이 끝나가는 시기가 왔다. 처음으로 맞는 종강이었다. 영중은 종강을 한다고 해서 훈련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별로 의미 있는 기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업이 없다는 사실에 개인 여유 시간이 늘어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 시험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쩐지 하늘이 새파랬다. 여름이라 그런가. 날씨 좋네. 이제 조금 있으면 많이 더워지겠지만... 본가에서 반팔을 더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어락을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별다를 것 없는 집인데. 어쩐지 현관에서부터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이상함? 아니 이건 기대감이다. 아직 정확히는 모르지만, 제가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발을 옮겼다. 고개가 위로 올라가자, 제가 잘 아는 어느 얼굴이 보였다.

 

"전영중."

"준수야?"

"비번 아직 안 바꿨더라."

"...응,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무슨 일이야? 말도 없이." 

 

잠시 뜸을 들이던 준수가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않냐?"

"할 말? 없는데, 왜?"

"있을텐데. 내가 아는데. 다."

 

 넌 내가 그때 자고 있는 줄 알았지?

 

 

 심장이 쿵, 하고는 저 아래로 곤두박질 치는 느낌이었다.

 깨어있었다고? 그럼, 내가 대체, 무슨 짓을...머리가 멍했다.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기서 도망쳐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굳어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아무말 없이 입술만을 달싹거리고 있자 보다못한 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옛날부터 참 생각하는게 복잡해서 나는 너무 네가 풀기 너무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같은 애라고 생각했어."

"..."

"그런데 네가 다가왔잖아. 네가, 부정할수도 없게끔 나한테 답을 말해버렸잖아. 이미."

"..."

"너가 지금 말하면, 내가 너한테 갈거니까. 말하기만 해봐."

오답이든 정답이든 답해줄테니까.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어떤 말을 해야할 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마음 속에 있던 응어리가 이 말을 꽉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옛날부터 행동으로 보여주던 애였으니까. 내가 하는 지금 이 행동을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성준수의 앞에 섰다. 조금 옅게 푸른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일었다. 시원해. 6월의 끝이 저의 열기를 식혀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았고, 

 그대로. 답을 말했다.

 

 준수야, 알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성준수가 슬며시 웃는 것이 느껴진다. 제 목에 팔을 감은 채 입술을 마주 붙이고 제 답을 받아들였다.

 

 

 

참으로도 어린아이 같은, 마치 장난스런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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